눈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작은 여인들이
쉴 새 없이
여기, 저기서, 온 하늘에서
인간들이 사는 지저분한
이 지구 위를 몰려들 온다
실로 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고운 옷을 가벼이 가벼이
가는 바람에 날리며
이리 섞이고 저리 섞이고
서로 섞여서
사뿐히 사뿐히
인간들이 더 갈 수 없는 이 지구에
쏟아져 내린다
쏟아져 내린 하얀 작은 여인들은
지구에 내리자마자
하얀 옷을 스스로 벗어 버리고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린다
죽음이 나에게도 이렇게 왔으면,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한 여인
모로코 시골 장터에서 서로 마주 보던
아랍의 여인
아름다운 그 얼굴이
아직도 깊이 굶주리고 있다
가난은 하늘에서나 지구에서나
어디에서나
슬픈 거, 애절한 거, 가련한 거
여인이여, 나의 밑천이란
찌릿, 찌릿한 이 눈물만이란다
빈손에 눈이 내린다
진종일을.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그 눈들은 땅에 내리자마자, 특히 물 고인 곳에 내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 눈들을 보고 있노라니, 동화에 나오는 작은 인형 같은 여인, 작은 하얀 요정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요정들은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작은 여인들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 무수한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요정들은 이 인간들이 더럽게 살고 있는 지구에, 땅에 내리자마자, 금세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 금세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의 죽음도 그렇게 금세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죽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물끄러미 한참 쳐다보고 있노라니 문득 모로코에서 만났던 아랍 여인이 무심코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눈이 쑥 들어간 굶주린 여인, 가엾고도 아름다운 그 까만 눈알이 선하게 눈 속에서 보였습니다.
이러한 무한한 상상과 회상 속에서 눈을 보고 있었습니다.
상상은 즐거웠으나, 회상은 쓸쓸했습니다.
– 『시의 오솔길을 가며』, 스포츠서울, 1992, pp 225 ~ 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