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11월 한떼의 수녀들이
우수수 깔린 낙엽을 밟고 간다
우거진 늦가을 플라타너스
로터리
빨간 우체통
나는 이곳에서
세계 구석구석
이승에의 그리움을 띄운다.
혜화동 로터리에 빨간 우체통이 있습니다. 매우 친절한 나의 애독자들이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우체통, 우체통을 통해서 그런대로 생긴 세계 각국의 시인들하고 나는 문통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단한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고 나의 작업실 앞길을 약 50m쯤 올라가면 수녀들이 기거하고 있는 기숙사가 있습니다. 혜화동엔 가톨릭 대학이 있고, 그 학교에 수녀들이 있습니다.
그 수녀들이 까만 옷을 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등교할 때 펭귄들이 몰려오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혜화동 로터리엔 나의 단골인 서점이 있고, 문방구점이 있고, 화구들을 파는 화구상이 있고, 식당이 여러 곳 있고, 다방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혜화동에서 빙빙 돌곤 합니다.
이제 늙어서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근 반세기를 살던 이곳의 정감이 저리게 가슴을 누르곤 합니다.
하기야 이 세상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만큼 고맙게 한 곳에, 한 집에, 한 주소에, 한 전화번호에 산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아직은 이곳 혜화동에 살고 있습니다.
-『시의 오솔길을 가며』, 스포츠서울, 1992, pp 120 ~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