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27호, 문득, 때로👁️ 조회수: 7,248 views

열차가 흔들리다가 문득
내가 누구에게 미운 일, 한 일 없는가
내가 누구에게 서운한 일, 한 일 없는가
내가 누구에게 배신한 일, 한 일 없는가
내가 누구에게 해로운 일, 한 일 없는가
하는 생각 들면서

나도 인간이어서
긴 인생을 인간으로 살다 보니까
더러는 그런 일 있었을지도,
하는 생각 아롱아롱 아롱거리면서
나만 이롭다고 내가 어찌 그런 일 했으랴

했다 해도 지금 이 자리
열차를 내릴 이 지점 가까이에서
내가 어찌하리

잊어버릴 뿐이어라
사죄할 뿐이어라
기도할 뿐이어라
감사할 뿐이어라

긴 나의 인생을.

사실 나는 지금 이러한 반성과 사과와 기도 그리고 스스로에의 고해로, 이 시대와 사회에서 물러난 자리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다 마친 사람처럼.

이런 마음 보여서 부끄러운 생각도 들지만, 내가 왜 이렇게 부지런하게 인생을 반성해 볼 사이 없이 살아왔는가, 하는 생각, 문득, 문득, 들곤 합니다.
차근차근하게 살아올 것을.

그럼, 다시 편지 드리겠습니다.

(2001. 2. 8)

편운재에서의 편지, 문학수첩 2003, pp 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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