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여행
조병화
유라시아 한반도 남부 해안도시로
강연을 떠난 일월,
급행열차 차창풍경
일월하순, 아직 겨울철인데도
새마을호 넓은 유리창 밖엔
논밭길에 파릇파릇
벌써 봄이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 산기슭 양지바른 곳엔
이미 와 있는 봄이
소곤소곤 어깨들을 비비며 모여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 중간쯤 되는 언덕, 복숭아 과수원엔
연한 어린 가지들이
찬바람을 쏘인 어린이들의 손목처럼
발가스레이
파란 바람이 지나가는 겨울 하늘에
가물 가물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디선지 말똥가리 한 마리가
달리는 차창 밖으로
훅, 날라 갔었다.
순간, 한 여인의 얼굴이 확,
한없는 그리움처럼
환하게 그곳에 떠올랐었다
아, 나는 지금
그렇게 한없는 그리움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아직도 떠돌고 있었다.
조병화, 제34시집『후회없는 고독』
이 작품의 제목은 손쉽게 그저 이라 했지만 실은 한없이 그리움을 사는 나의 인생 방황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 나의 인생은 한 마지로 긴 방황, 그 꿈을 찾아서의 끊임없는 모색의 여행이 아니였던가.
(생략)
이제 머지않아 봄이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이 추운 겨울을 하루 하루 이겨나가고 있다. 동시에 이제 봄이 오면 하는 약동하는 희열을 생각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나는 계절 중에서 2월을 제일 좋아한다. 시인들은 거의가 가을이 좋다고 하고 그 가을도 늦가을이 좋다고들 하지만 나는 봄이 가까이 와 있는 이 차가운 2월을 좋아한다. 아직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지만 머지않아 풀릴 그 2월의 차가움, 그 계절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골 양지 바른 곳에, 산골물따라 피어나기 시작하는 버들강아지, 그리고 그 다음을 이어 피기 시작하는 산수유, 그 노란 꽃들, 그 향기, 이 무렵이 되면 나의 기분은 미쳐버리고 만다. 버들강아지, 산수유 피는 계절, 아! 신이여, 나에게 더 더 그들을 노래 부를 수 있는 재능을, 그 감각을 주소서 하고 기원하고 싶을 정도로 나의 기분은 들뜨게 된다.
겨울이 차고, 추울수록 이 2월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와 매한가지로 우리들 인생도 참으면 참을수록,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리우면 그리울수록 그 미지의 그것이 다가올 때 더 더 황홀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생전 기쁜 일, 쓰라린 일이 있어도 기쁠 때 그리 기뻐하지 않고 쓰라릴 때 그리 쓰라려 하지 않으며, 그저 그런 거 되도록 이렇게 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2월, 봄이 머지 않아 오는 계절이 되면 그 약동하기 시작하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속으로, 안으로 안으로, 누루면서, 감추면서 태연하게 사는 것 같이 살아왔지만 속으론 대단한 기분의 요동을 살아오곤 했다. 인간은 좀 쓸쓸히 사는 게 좋다. 여러 가지를 깊이 생각하며, 깊이 느끼며, 깊이 깊이 사는 맛을 음미하며 사는 것이 좋다. 들떠가지곤 이런 아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깊이 깊이 가라앉아서 깊이 생각하며, 깊이 느끼며, 깊이 음미하며 좀 쓸쓸히 살아가는데 알맞은 계절이 이 2월이라고 하겠다.
가장 충만하면서 가장 비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계절, 그 계절이 바로 2월이다.
조병화, 『시간 속에 지은 집』, 인문당, pp. 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