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33호 일월 여행 (2010년 2월 16일)👁️ 조회수: 7,938 views

일월 여행
조병화

유라시아 한반도 남부 해안도시로
강연을 떠난 일월,
급행열차 차창풍경

일월하순, 아직 겨울철인데도
새마을호 넓은 유리창 밖엔
논밭길에 파릇파릇
벌써 봄이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 산기슭 양지바른 곳엔
이미 와 있는 봄이
소곤소곤 어깨들을 비비며 모여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 중간쯤 되는 언덕, 복숭아 과수원엔
연한 어린 가지들이
찬바람을 쏘인 어린이들의 손목처럼
발가스레이
파란 바람이 지나가는 겨울 하늘에
가물 가물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디선지 말똥가리 한 마리가
달리는 차창 밖으로
훅, 날라 갔었다.

순간, 한 여인의 얼굴이 확,
한없는 그리움처럼
환하게 그곳에 떠올랐었다

아, 나는 지금
그렇게 한없는 그리움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아직도 떠돌고 있었다.

조병화, 제34시집『후회없는 고독』

이 작품의 제목은 손쉽게 그저 이라 했지만 실은 한없이 그리움을 사는 나의 인생 방황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 나의 인생은 한 마지로 긴 방황, 그 꿈을 찾아서의 끊임없는 모색의 여행이 아니였던가.
(생략)
이제 머지않아 봄이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이 추운 겨울을 하루 하루 이겨나가고 있다. 동시에 이제 봄이 오면 하는 약동하는 희열을 생각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나는 계절 중에서 2월을 제일 좋아한다. 시인들은 거의가 가을이 좋다고 하고 그 가을도 늦가을이 좋다고들 하지만 나는 봄이 가까이 와 있는 이 차가운 2월을 좋아한다. 아직 땅은 꽁꽁 얼어붙어 있지만 머지않아 풀릴 그 2월의 차가움, 그 계절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골 양지 바른 곳에, 산골물따라 피어나기 시작하는 버들강아지, 그리고 그 다음을 이어 피기 시작하는 산수유, 그 노란 꽃들, 그 향기, 이 무렵이 되면 나의 기분은 미쳐버리고 만다. 버들강아지, 산수유 피는 계절, 아! 신이여, 나에게 더 더 그들을 노래 부를 수 있는 재능을, 그 감각을 주소서 하고 기원하고 싶을 정도로 나의 기분은 들뜨게 된다.

겨울이 차고, 추울수록 이 2월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와 매한가지로 우리들 인생도 참으면 참을수록,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리우면 그리울수록 그 미지의 그것이 다가올 때 더 더 황홀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생전 기쁜 일, 쓰라린 일이 있어도 기쁠 때 그리 기뻐하지 않고 쓰라릴 때 그리 쓰라려 하지 않으며, 그저 그런 거 되도록 이렇게 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2월, 봄이 머지 않아 오는 계절이 되면 그 약동하기 시작하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속으로, 안으로 안으로, 누루면서, 감추면서 태연하게 사는 것 같이 살아왔지만 속으론 대단한 기분의 요동을 살아오곤 했다. 인간은 좀 쓸쓸히 사는 게 좋다. 여러 가지를 깊이 생각하며, 깊이 느끼며, 깊이 깊이 사는 맛을 음미하며 사는 것이 좋다. 들떠가지곤 이런 아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깊이 깊이 가라앉아서 깊이 생각하며, 깊이 느끼며, 깊이 음미하며 좀 쓸쓸히 살아가는데 알맞은 계절이 이 2월이라고 하겠다.

가장 충만하면서 가장 비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계절, 그 계절이 바로 2월이다.

조병화, 『시간 속에 지은 집』, 인문당, 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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