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275호 (『나 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조회수: 12 views

제92신  아카시아 숲 걷던 그날

내가 좋아하는 아카시아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아카시아는 나만 좋아하겠습니까만, 참으로 그 향기, 그 꽃 피어 너울거리는 자태, 신록 우거져 가는 계절, 이 모든 눈부신 오월이 지금 눈앞에 전개되어 가고 있습니다.
잘 지내시겠지요.
어제는 매년 이 무렵에 행해지는 예술원 봄 세미나를 충주 부근에 있는 화가 운보(雲甫) 김기창 별장에서 가졌습니다.
세미나도 세미나지만 봄 나들이를 하는 것이지요.
이제 예술원 회원들의 평균 연령도 늘어서 일흔네 살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평균 연령을 이제 넘어가는 세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하직할는지, 참으로 인생을 오래도 살아온 생각이 듭니다.
들면서 참으로 많은 시들을 위안으로, 나의 철학을 철학하면서 줄곧 외길 고독한 사색의 일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 많은 시들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을는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미나 발표는 서울대학교 권순형(도예가) 교수와 차범석(연극) 회원이 했습니다.
‘운보의 집’이라고 별장 명칭이 붙어 있었습니다. 김기창(운보) 화백답게, 거창한 별장이었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나의 시골집 ‘구름의 집(The House of Cloud)’은 아주 소규모의 동산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집에 비해서, 어딘가 정돈이 덜 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루를 이러한 농촌, 대자연에서 지내면서,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남한산성 아카시아 숲을, 당신과 나란히 걷던 그날, 그날을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이지요.
세월은 이렇게 지나가면서 나만 남기고 가는 것 같습니다. 나도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몇몇 남아 있는 동안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할 텐데.
그럼, 이 좋은 계절을 푸르게, 푸르게, 푸른 건강으로 지내시길. (199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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