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70호 (『왜 사는가』)👁️ 조회수: 1,433 views

좀 조용하게, 아름답게

특히 여성 생활을 소재로 한 글을 그리 쓴 일이 없다. 여성이고 남성이고 그저 따지지 않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지혜로운 길, 편안한 길, 뜻있는 길, 보람있는 길, 아름다운 길, 그런 것을 찾아서 나는 이렇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써 본 일은 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 권유를 한다든지, 교훈을 한다든지, 설교를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나는 이렇게 살아왔으며 이렇게 살아갔으면 한다는 뜻에서 나의 생각을 늘어놓은 것들이다.
사실 부끄러운 일들이다. 글을 쓴다는 건 어느 의미에서 뜻있고 즐거운 일이지만, 부족한 자기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되어서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엔 수천, 수만, 수억만 여의 인간들이 모여들 살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자기 생각을 피력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도 듣고 비평을 듣는 것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을 하면서 자위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서로 서로의 생각, 그 지혜, 그 행동을 통해서 서로 서로의 부족한 자기 인생을 보완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그 대중 속에 던져 보는 것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면서도 나는 나의 의견이나 주장이 위선적인 것으로 남에게 전달되지나 않을까, 우선 그걸 반성해 가면서 글을 써 온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내가 책임지지 않을 것은 쓰지 못한다. 내가 한 거, 해서 책임지는 거, 나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거, 아니면 쓰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까지 잘난 체하는 것을 쓴 일이 없다. 쓸 수가 없다. 쓰지 못했다. 아는 체하는 것, 그런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쓸 땐 항상 자기와 자문자답을 해가면서 내가 그렇다 하고 내 자신에게 수긍이 가는 거, 그것을 찾아가며 쓰는 것이다.

꿀벌들이 꿀을 찾아
꽃을 돌 듯이
약속을 찾아 쏟아져 나온
꽃다운 숙녀들
토요일, 명동 오후의 거리는
화장 냄새의 물결이다.

아, 이 엄청난 생명의 수라장
팽팽한 가슴, 가슴
빨갛게 타는 입술들
알몸으로 태양이 뒹군다.

미는 자와 밀리는 자
솟는 자와 가라앉는 자
이곳엔 어제가 없다

꿀벌들이 꿀을 찾아 돌듯이
약속을 찾아 도는 사막의 꽃들
빨간 입술들
명동의 거리
벌거벗은 오후에 나는 취한다.

1982년 5월이라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토요일 오후」라는 시이다. 나의 제26시집 󰡔머나먼 약속󰡕이라는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와 같이 초여름 어느 토요일 명동 거리로 나간 일이 있다.
해방, 그리고 6•25 이후 수복된 서울 명동 거리는 술집, 찻집, 가난한 문인, 예술가들의 거리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깊은 밤까지 대한민국의 예술가, 기자들은 이곳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국산 영화가 붐을 타서 영화계 인사들이 판을 치기 시작해선, 돈 없는 문인들은 이곳에서 밀려나가 뿔뿔이 분산해 버렸다. 돈이 행세하는 명동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영화계 인사들이 그 돈으로 명동의 생활 구역을 넓혀 갔던 것이다.
그 후 국산 영화도 견디기 어려워지자 여자들의 옷 가게 구두 가게들이 그 세력을 넓혀 가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명동을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명동은 실로 여자들의 용품(用品) 거리로 변해버렸다. 구두 아니면 옷, 아니면 화장품, 요란한 여자들의 천지로 변해버렸다.
골목, 골목 가득히 흐르고 있는 여자들의 물결, 그 빨간 입술들의 물결, 짙은 화장들의 물결, 요란한 눈썹들의 물결, 정력들이 넘쳐흐르는 호르몬 땀 냄새의 물결, 개기름과 화장물들이 범벅이 되어 흐르는 얼굴들의 물결, 참으로 명동은 젊은 여성들의 물결이다.
이러한 풍경들은 실로 피곤한 풍경들이다. 좀 조용히 살 수는 없을까. 고요한 복장, 고요한 화장, 고요한 말씨, 고요한 행동, 고요한 교양, 이러한 피곤하지 않은 풍경들은 없을까.
실로 요란한 복장, 요란한 화장, 요란한 행동은 피곤한 것이다. 이러한 소비생활은 피곤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돈처럼 피곤한 게 어디 있는가. 그것처럼 불안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돈을 쓰는 것처럼 피곤하고 불안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아껴서 살 때 피곤이 없는 것이다. 안전한 것이다. 편안한 것이다.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그럴 때 인생을 살아갈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날 이처럼 떠들썩한 세상에서 가장 피곤하지 않게 가라앉아서 살아가는 길은 근면과 절약, 그 소박한 생활에 있는 것이다. 물질적 허영 생활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알맞게 욕심을 다듬어 가며 살아가는 곳에 그 현대의 평안과 위안, 그 마음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허황된 꿈, 얼마나 불행한 유혹인가. 필요 이상의 물질, 그 얼마나 불안한 재산인가. 그건 재산이 아니라 재앙의 씨앗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근심을 면할 수 없는 그 물질의 유혹, 실로 살아가면서 그 욕심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꿈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욕심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과도한 꿈, 그 욕심은 추악한 인간으로 그 인간을 추락시키는 것이다. 알맞는 꿈, 알맞는 욕심, 그것은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며 향기이다. 아름다운 꿈. 아름다운 욕심. 이것은 자기 분수를 아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여유이며, 그 인생의 아름다움이다.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
저녁 노을에 무지개 서는
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향수는 없어도 좋다
긴 치맛자락 그대로의 냄새를 피워라
빨간 옷고름이 노을 바람에
다시 보고 싶은 편지 조각같이 휘날리는
아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다오
분수야 네게 어울리는 잔디밭에 영 있어라
너는 외로운 사랑을 부르지 않아도 좋다
외로움은 언제나 나에게 주어라
노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수줍어하는 네 옷고름 같은 그리운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하두 그리워 네 곁을 소리 없이
오고 가는 그 마음을 영 나에게 주어라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일랑 말라.
차라리 부끄러워하는 입김을 내어
그리움일랑 영 나에게 다오

이 작품은 「분수」라는 시, 나의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이라는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지만, 이렇게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장소에서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생활, 그 인생을, 인간들은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서, 여유 있는 인생을 위해서, 서로 서로가 아름다운 이웃이 되기 위해서.
조용히, 실로 고요히, 이 요란하고 떠들썩한 이 광란의 현대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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