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와 여수(旅愁)
나는 수없이 많은 럭비 시합을 해 왔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도전’이라는 단어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다.
나는 한 번도 인생에 도전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기실 나에겐 도전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욕심이 없는 욕심, 의욕이 없는 의욕, 갈망이 아닌 갈망, 부정이 아닌 부정, 포기가 아닌 포기, 회색이 아닌 회색, 인생 그걸 살아왔을 따름이다.
나는 니힐리스트도 못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긍정주의자도 못 된다. 이러한 양 가운데서 그저 ‘나’를 내 능력대로 충실히 살고 있는 하나의 유한(有限)의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난 나를 사는 거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죽음’을 설정해 놓고 사는 버릇이 있었다. 우리 인간들이 지금 아우성치며 살고 있지만 그건 무한한 생명의 불사조도 아니고, 극히 짧은, 지극히 짧은, 먼지 같은 시간을 살다 가는 ‘유한의 존재’라는 걸 긍정해야만 살 수 있는 편안한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다.
때문에 세상을 보되 세상이 아닐 때가 있고, 날 보되 내가 아닐 때가 있고, 이웃을 보되 이웃이 아닐 때가 있고. 만물을 보되 만물이 아닐 때가 있고, 세상만사 모두 변하는거! 이렇게 보아 오곤 했다. 때문에 도전할 아무 것도 없는 거다. 이 세상은 나에게 있어서도 지극히 순간적인 가숙(假宿)! 임시 숙소에 지나지 않는 거다. 때문에 나에게 도전이 있으면 그 죽음에 대한 도전, 도전 아닌 도전, ‘순응을 위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난 일체의 애착으로부터의 절연으로부터 내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던 거다.
확실히 죽음은 내 인생에 대한 가장 최초의 도전이었으며, 가장 최대의 도전이었으며, 가장 최후의 그것이었다. 죽음은 인생에게 오히려 순응의 교훈보다 더, 더 강렬한 반항 내지 도전의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세상에 만약 죽음이라는 하나의 정리 단계가 없었더라면 모든 철학, 모든 문학, 모든 예술, 모든 종교, 모든 인간 행동과 그 작업은 달라졌으리라.
일본의 대소설가 나쓰메 소오세키〔夏目漱石〕의 풀베개(草枕)는 이렇게 시작된다.
“산길을 오르며 이렇게 생각한다. 인지(人知)를 살면 모가 서고, 인정에 돛을 달면 떠내려가고, 고집을 세우면 갑갑하다. 하여튼 인간의 세계는 살기가 어렵다. 살기가 어려워지면 어디론지 이사를 하고 싶어진다. 이사를 해 본댔자 어디나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곳……” 그래서 그림이 나오고, 글이 나오고, 예술이 나오게 된다는 거다.
물론 나는 여기서 예술의 기원설이나 시론(詩論)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범속이 현실이 주는 정신의 마비, 그것이 주는 일체의 좌절과 권태, 또한 그것이 주는 고차적인 신경의 충돌, 또한 그것이 주는 일체의 우울과 고독, 또한 그것이 주는 일체의 고립과 비타협, 또한 그것이 주는 일체의 부정, 또한 그것이 주는 새로운 녹색의 꿈 같은 현실에 대한 도전 내지 항거, 또한 그것이 주는 새로운 기발한 또 하나의 생의 활동, 다다족(族)이 그랬고, 비이트족이 그랬던 그러한 새로운 싱싱한 생명의 공기를 말하고자 하는 거다.
일체의 예술 행위는 그러한 새로운 생명의 행위인 거다. 그건 따분한 상식의 세계 속에서 마비상태로 칩거를 하고 있는——하늘이 없고, 목초가 없고, 광야가 없고, 태양이 없고, 푸른 공기가 없고, 생명의 쓰레기 같은, 일반 상식의 식충(食虫) 같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서부(西部)! 바로 그것인 거다. 그러나 이러한 푸른 생명의 서부는 아웃사이더들에게만 발견되는 세계인 거다.
그건 갈망 속에서의 희열, 절망 속에서의 탈출, 질식 속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거다.
시가 세속 세계를 부수는 화약이며, 영원을 보는 화약이라 말한 시인의 절규처럼, 시를 사는 인간들은 그만큼 맑은 공기 속을 방황하며, 영원을 사는 고독의 희열을 지닌 사람들이라 하겠다.
머리로 살자니 모가 나고, 모가 서고, 따지게 되고, 충돌만 생기는 이 상식의 통속 세계. 그렇다고 인정으로 살자니 속아 넘어가고, 바보가 되고, 손해만 보고 그대로 정에 떠내려가 버리는 이 염치없는 속된 통속 세계. 그렇다고 고집을 부리자니 더럽고 비굴하고 치사하고 갑갑하고 귀찮고, 떼거리들같이 덤벼드는 그 무식하고 체면 없고 야비한 통속의 통속, 구더기들 같은 더러운 통속에서…… 이렇게 되어서 혼자 초연히 사는 길에 예술이, 철학이 생긴다는 소설가의 현실 도피 아닌 현실 인내에 얼마나 많은 공감이 가는가.
“취해서 살아라(도취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시간의 노예가 된다.”
이 말은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말이다.
취해서 산다! 매사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다. 매사에 권태를 느끼고 사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 또한 매사에 좌절을 느끼고 사는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다. 물론 나에겐 행복하다, 불행하다라는 단어는 인연이 멀다. 나에겐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고, 비참도 없고, 처참도 없고, 다만 ‘존재’만이 오늘 속에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 자체만이 전부인 거다.
움직이고 있는 그 순간순간의 ‘나’, 그 자체가 그 전부인 거다. 그렇다고 난 찰나주의자도 못 된다. 약하기 때문이다. 약한 자에겐 약한 자의 지혜가 있는 법이다. 그건 ‘버리며’ 살며,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하며, ‘탈출하지 않으며’ 탈출하며, ‘도피하지 않으며’ 도피하며, ‘부정하지 않으며’ 부정하며, ‘자학하지 않으며’ 자학하며, ‘권태하지 않으며’ 권태하며, ‘외로워하지 않으며’ 외로워하는 그 비정의 단독을 사는 데서 오는 작은 지혜, 바로 그거다.
취해서 산다! 열중해서 산다! 도취해서 산다! 얼마나 생생한 아름다움과 진실과 전부를 살고 있는 인생인가.
기실 인생엔 아무런 구속이 없는 법이다. 하고 싶은 걸 살 따름이다. 혼자의 책임을.
일전의 일이다. K다방에서 대선배 시인이신 K선생을 만나뵈었다. 하시는 말씀이 “이젠 열중할 것이 없어 살맛이 안 나네” 하신다. K시인께선 올해 진갑이시다.
항상 부지런하시고, 젊으시고, 매사에 꼼꼼하시고, 정열적이시고, 항상 세속과 싸우시며, 스스로의 자릴 지켜 오신 자아의 순례(巡禮)! 그 곧은 길을 오로지 평생토록 살아오시는 분이시다. 나는 즉석에서 수긍이 갔다. 참으로 아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다. 긴 장거리의 인생 경험에서 떠오른 말씀이시다.
그렇다! 어디인가 인생 한자리 자기의 온 정열을 쏟아 볼 곳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송장을 살 뿐이다. 살아서 그 송장을 살 뿐이다. 보들레르의 그 ‘시간의 노예’를 살 뿐이다.
이러한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어, 완전한 자유인이 된 사람들은 동서고금, 자고로 그 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들이 아니었던가. 일체의 개혁자 쳐놓고, 일체의 사상가 쳐놓고, 일체의 철인 쳐놓고, 일체의 예술가 쳐놓고, 일체의 발견자 쳐놓고, 일체의 선구자 쳐놓고……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아닌 사람이 있었던가.
천재들에겐 그 시대에 있어서 세속은 너무나 더러운 고독한 장소이며 흥미 없는 장소였었다.
여행은 세속을 떠나서 사는 인생의 즐거운 드라마이다. 나는 이 드라마 속에서 내 반평생을 보내고 말았다.
때문에 내 온몸은 그 끊임없는 여수에 배어버렸다.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을 떠나서 있고, 집에 있으면서 집에서 떠나서 있고, 이웃과 같이 있으면서 이웃에서 떠나서 있다. 무엇보다도 나와 같이 날 살면서 나에게서 떠나서 있다. 나와 또 다른 나와의 사이에서 날 여행하고 있는 날 살고 있는 거다.
화려하고, 쓸쓸하던 영국의 종달새 P.B. 월리는 “인생은 사랑을 찾아서의 긴 여행”에 불과하며 “시인은 공인이 없는 입법자”라 했다.
인간은 스스로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고 그 많은 자유를 잃고 생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명에게 주어진 그 많은 하늘을, 그 많은 목초를, 그 많은 광야를 잃고, 어두컴컴한 윤리니, 도덕이니, 습관이니, 인습이니, 전통이니, 역사니 하는 속에서 옴쭉달싹하지 못하고 그저 살다 가는 건 아닌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대로 “창 밖에 새파란 목초가 있는 것도 모르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시든 목초를 씹고 있는 어리석은 양”과 같은 공연한 사색꾼은 아닌가.
인간은 묘한 것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자고들 한다. 좋다. 모든 인간들이 서로 공존하기 위하여, 같이 살기 위하여, 피차를 해롭히는 건 일체 하지 않는 그 법과 그 제도, 정신을 지켜야 할 인간적 그 책임과 그 의무가 모든 인간들에겐 있다. 그러나 보다 살기 좋은 정신의 목장을 찾아서 우린 그 따분한 일상을 부수고 나올 필요가 있다. 항상 보다 살기 좋은, 보다 생명의 가치가 넘쳐흐르는 그 인간 세계의 푸른 목장을 찾아서 이동을 할 필연이 있다.
매일매일은 그곳 한 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동을 하고 있는 거다. 이동하는 인간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사는 거다. 그건 일상에 대한 과감한 도전자만이 발견하는 생명이요, 해방이요, 고독인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