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61호 (『왜 사는가』)👁️ 조회수: 1,850 views

시•그림•수학•럭비

지금 나는 시를 살고 있다. 시를 창작하고, 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살고 있다.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살고 있는 시인이라고 할까. 매사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시의 세계를 찾아서 살아나가고 있다. 내가 동경 고등사범학교에서 전공한 것은 물리화학이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교단에 선 것도 물리와 수학의 담당 교원이었다. 물리나 수학도 시와 매한가지로 순수한 머리의 세계이며 직선적인 세계이다. 잡음이 없다. 모순이 없다. 순수하다. 먼지가 없다. 나는 그 세계에서 나의 머리의 순수한 논리를 길러왔다. 또한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거쳐 사회에 나와서까지 근 10년간을 내가 좋아하는 럭비의 선수생활을 했다. 이 럭비 역시 다른 스포츠에 비하면 직선적인 운동이다. 강한 직선적인 스포츠, 그 럭비에서도 나는 내 생활의 곧은 직선적인 성격을 길러 왔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볼 때 나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곧은 직선으로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시와 수학과 럭비, 이러한 곧은 길을 숨 가쁘게 달음박질을 해 온 것 같은 생각, 지나온 세월이 번개처럼 짧은 감이 들곤 한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살고 싶었다. 그림을 전공하고 싶었다. 서대문에 있는 미동 공립 보통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전교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소년이었다. 5학년 때 그린 크레파스 그림이 교장실에 걸릴 정도였다. 그리고 학교를 대표해서 그림을 출품하기도 했다. 상공회의소인가 하는 전시장에서 나의 그림이 전시된 걸 보고 기쁨에 가득 차기도 했다. 그리고 경성 사범학교에 입학을 해서도 미술부에 들어서 그림을 그렸다. 그때 선배로서 5학년에 고(故) 이봉상(李鳳商)님이 있었다. 손일봉(孫一峯)선생은 대선배로서 선전(鮮展)에 특선을 했다는 수채화•풍경화만이 미술부실에 걸려 있었다. 일본인 학생, 한국인 학생, 많은 부원들이 있었다. 일요일엔 한강으로 뚝섬으로 야외 사생을 나가곤 했다. 지금 일본에서 크게 성공하고 있는 사이또 오기요시〔齋藤淸〕, 미야자끼 기요시〔宮崎淸〕, 아사오까 간이찌로오〔朝岡寬一郞〕씨 등도 우리 경성사범학교 미술부 출신이다. 졸업할 무렵 김경승(金景承) 선생께서 일본 우에노〔上野〕미술학교〔지금의 동경예술대학)를 졸업하시자마자 오시어서 조각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나는 럭비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편 미술부 생활을 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동경 고등사범학교 예능과로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형님의 부탁으로 물리화학과를 택하게 되었다. 물리화학과엘 다니면서 나는 예능과 교실들을 기웃기웃하면서 눈으로 예능과 생활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럭비부 연습이 없는 일요일 오후엔 우에노 미술관이니 긴자〔銀座〕의 여러 화랑이니, 백화점의 전시장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림들을 구경하며 배우며, 그림에 대한 교양을 쌓아오곤 했다.
해방 직후부터 나는 나의 모교인 경성 사범학교에서 물리•수학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그 해방의 혼란 속에서 나는 지독한 고독을 앓았다. 그 좌절과 고독에 쌓여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로써 그 좌절과 고독의 병을 스스로 치료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시 생활의 출발이며, 물리•수학을 버리게 된 동기였다.
1972년부터 나는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의 일을 맡게 되었다. 이 넓은 학장실 구석에 작은 아뜨리에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야외 사생을 하곤 했지만, 그리고 싶었던 그림, 그림 그리는 동안의 그 쾌감, 그것이 나의 큰 휴식이 되었다. 시보다도 즐거운 작업, 실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은 나의 생을 충만하게 살고 있는 희열감에 쌓이곤 했다. 그림을 배워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곤 했던 것이다. 시와 그림, 그걸 같이 사는 순수한 세계로 나는 나의 나머지 인생을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는 나의 철학이며, 그림은 내가 살고 싶은 아름다운 세계의 표현이다.
지금 나는 이 시와 그림의 곧은 두 세계를 같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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