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58호 (『왜 사는가』)👁️ 조회수: 2,406 views

술통과 경희궁 터

수많은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써오고 있지만 별명에 관한 청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술통과 경희궁 터」라는 제목으로.
나는 1949년 2월부터 서대문에 있는 경희궁 터에 자리하고 천하의 영재들을 교육시키고 있던 서울 고등학교에 물리 선생으로 들어가서, 수학 선생, 작문 선생을 10년 동안 하다가 1959년 2월에 경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참으로 즐겁던 시절이었고, 좋은 학생들과 좋은 동료 교사들을 만났었다. 그리고 그때가 나에겐 가장 무성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두 개의 별명을 얻었다. 들어가서 몇 달 지난 뒤에 얻은 별명이 ‘고깃덩어리’이고 부산 피난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얻은 별명이 ‘술통’이었다.
내가 서울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그 유명한 김원규(金元圭)가 교장이었다. 김 교장은 평양 실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교육계의 명문 광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꿈이 컸던 분이었다. 서울 고등학교를 일본 동경에 있는 제일 고등학교 같은 명문교로 만드는 것이 그분의 꿈이었다. 그래서 수재를 뽑아서 수재 교육을 시켜 일류대학으로 진출시키려는 교육으로 일관했었다. 때문에 학생들보다도 선생들이 더 긴장하는 판이었다. 물론 학생들도 눈코 뜰 사이 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더구나 대학입시의 주종과목인 국어•영어•수학에 있어서는 두 배, 세 배, 네 배, 백 배 공부를 더 해야 했다.
그야말로 책에서나 읽었던 스파르타식 교육, 바로 그것이었다. 공부도 공부려니와 그 학교 규율이 보통이 아니었다. 우선 복장이 그러했다. 바지에 호주머니가 없었다. 손을 넣을 호주머니가 없었다. 때문에 엄동설한에도 학생들은 찬바람에 손을 내놓고 다녀야 했다. 군대식이라면 군대식, 그렇게 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장 선생 말이라면 절대적이었다.
찬 겨울 아침 조회땐 선생이나 학생이나 모두 덜덜 떨어야 했다. 덜덜 떨고 있는 가운데서도 꼼짝 말아야 했다. 긴 훈화를 들으면서, 실로 김 교장의 훈화는 길었었다. 40분, 50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땐 거의 두 시간 동안 훈화를 하곤 했다. 이렇게 긴 훈화를 들은 겨울 아침엔 맥이 없었다. 교실이나 직원실에서 한참 몸을 녹여야만 했다. 그리고 수업, 수업도 육사니 해사니 하는 사관학교 학생들 같은 자세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김 교장은 잠시도 교장실에 앉아 있질 않았다. 그 넓은 교실을 어떻게들 공부를 하고 있나 하고 순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김 교장의 교육에 대한 열성을 우선 높이 샀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 참으로 강한 교육열이다라고.
그러면서도 학생들이 꼼짝 못하고 있는 걸 보고 너무나 학교 규칙에 눌려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너희들은 고깃덩어리 같다. 너희들에게는 활기가 없다. 고깃덩어리들” 하고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생기를 가지라는 뜻에서.
그러자 그날부터 나를 보면 멀리서 “저기 고깃덩어리가 간다” 하는 학생들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화가 났었다. 젊었었으니까.
“내가 왜 고깃덩어리냐. 너희들이 고깃덩어리란 말이야.” 이렇게 나는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큰소리로 화를 내며 되물었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나도 웃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마음에 거슬리는 ‘고깃덩어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별명을 던진 것이 반대로 나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불명예스럽게도.
그러다가 다음 해, 그러니까 1950년 6월 25일, 뜻하지 않게 공산당들이 남으로 쳐들어와 조국은 엉망으로 되어버리고 우리들은 뿔뿔이 헤어져야만 했다.
그 주력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들은 부산 송도로 넘어가는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다시 학교를 열게 되었다. 그것이 1951년 가을인가 한다. 하나, 둘, 학생들이 모여들고, 선생들이 모여들었다. 참으로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학생들은 마냥 귀엽기만 했다. 나는 펄럭이는 천막 교실에서 한없이 내려다보이는 부산, 그리고 먼 바다, 그리고 그 바다에 떠있는 무수한 병원선을 내려다보면서 생명의 애수 같은 시를 썼다.

하얀 구각(具殼) 속에서 수업을 한다
산머루처럼 익어가던
까만 눈알들이
따발총에 혼 떼어
파란 해협의 어란(魚卵)처럼 맑다

고사리 같은 하얀 목들은
바다를 향하여 날로 깊어진다
하얀 구각 속에서
어란처럼 맑은 눈알들에 끼어
아내와 싸우고 나온 기억을 잊어버린다

비 내리는 날이면
나의 임해교실(臨海敎室)은
Holiday!

바미리온 표식 아래 누워
나는
발진티푸스에 걸린 바다를 내려다본다
생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쓴다

아시아 작은 반도(半島)
남단으로 밀려와
하얀 구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임해교실(臨海敎室)」이라는 제목의 시, 실로 이러한 풍경 속에서 부산으로 모여드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군대 통역장교로 중부전선에가 있다던 동료 교사 이종구(영어 선생, 현재 건국대학 영문과 교수) 형이 학교로 돌아왔다. 반가운 김에 때마침 점심시간도 되어 해변가 통술집으로 내려와 낙동강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때마침 그 앞을 하학길에 지나던 학생 하나가 통술집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대뜸 ‘술통!’ 하고 불렀던 것이다. 통술집의 통술을 반대로 읽었던 것이다. 글자가 옆으로 쓰여 있었으니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던 것이다. 실로 귀여운 중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나는 “빨리 가라, 가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어지간히 마셔댔다. 전쟁 이야길 하면서. 고생하던 이야길 하면서. 먼지투성이 군복 차림의 이 교수는 참으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이튿날 교실이라는 울타리 없는 천막에 들어서니 칠판에 ‘술통’ 이렇게 백묵으로 씌어 있는 게 아닌가. 큰 통술통을 그려놓고. 순간, 나는 술통이라는 어감에서 어떤 구수한 친근감을 느꼈었다. “임마, 술통이 뭐야 통술집이지.” 하며 그저 웃으며 수업을 시작했었다.
그날부터 나는 ‘술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별명을 지어준 이 군은 연대를 나오고, 지금 뉴욕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다.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혹시 이 글이 뉴욕까지 가서 이 군의 눈에 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별명으로 인해서 연말이면 뜻하지 않게 그 당시엔 좀처럼 얻기가 힘들었던 화이트 호스(양주) 두 병씩을 연말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 군의 모친께서 늘 미안한 생각으로 주시는 것이다. 모친은 항상 “집의 아이가 철모르게 선생님께 이상한 이름을 붙게 만들어서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욱 편안합니다. 모든 것을 술통답게 살 수가 있어서요.” 이렇게 답변하곤 했었다.
사실 그랬었다. 나는 이 ‘술통’이라는 별명 때문에 참으로 많은 자유를 누리며 부산 천지를 살았으며, 서울 천지를 살았었다. 구수하게, 재미있게, 인생답게, 허물없이, 아무런 가면을 쓸 것도 없이 인간 그대로도.
덕분에 술도 많이 생겼었고, 지금도 졸업생들이 술을 많이 대접해 준다. 뉴욕에서,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에서, 파리에서, 런던에서, 동경에서, 서울에서. 지구 어디서나 우리 서울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있는 곳에선.
나는 시와 그림과 술통이라는 별명으로 실로 많은 학생들과 친숙하게 지냈고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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