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의 목로주점
명동으로 깊이 들어가면 〈피가로〉라는 다방이 있었고 〈돌체〉라는 다방이 있었다. 피가로엔 김기림씨 그룹이 많이 드나들고, 돌체엔 이봉구씨를 비롯해서 고전 음악을 좋아하는 예술인들이 출몰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명동 어린이 공원 부근에 명동장, 무궁원이라는 대중 목로주점이 있었다. 이 명동장, 무궁원이 6•25 동란 전까지의 명동 예술인들의 소굴이었다.
빈대떡 지지는 냄새, 생선 굽는 냄새, 그 연기, 곱창•불고기 굽는 그 냄새, 그 연기. 그 냄새와 연기 속에 자욱이 들어들 박혀 저물도록, 실로 저물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좌익과 우익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신경 속에서. 욕설과 불평불만, 옹호와 대립, 마침내 초기 대한민국이 몽땅 모여 있는 장관이었다.
저녁이면 나는 「경향신문」 문화부장(당시) 김광주씨와 자주 이곳에 들렀었다. 경향신문엔 안수길(安壽吉), 정충량(鄭忠良), 최영수(崔永秀) 제씨가 있었다. 곧 친분을 갖게 되었다. 김광주씨는 말이 없는 분이다. 여간해서 흥분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마시고, 마시고, 허허 웃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기분 상하는 일이 있으면 그 주정과 그 호통, 금할 길 없다. 그런 분이었다. 대륙적인 성격이 있으면서 서울 사람의 기질이 강한 분이었다. 중국을 뿌리로 하고 있는 동양적인 예지와 서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칼날 같은 성분이 잘 배합되어 있는 분이다. 따라서 순한 것 같지만 강하고, 약한 것 같지만 강인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김 선생의 외상은 유명했다. 어디고 외상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것도 한두 푼의 외상이 아니다. 쌓이고 쌓이고 더께같이 쌓이는 외상이다. 그러나 누구를 해롭게 하는 외상이 아니다. 주인에게도 기분이 좋은 외상이고 손님에게도 기분이 좋은 외상이다. 아무리 외상이 쌓이고 쌓여도 ‘언젠간 저분이’ 하는 서로 믿는 외상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김수영(金洙暎)을 만났다. 수영은 이때부터 그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훅 떠날 때까지 참으로 줄곧 서로 통해서 지냈지만 때론 언성을 높인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하면 그는 말버릇처럼 나는 부르조아지고 자기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거다. 나는 귀족이고 자기는 서민이라는 것. 그러나 다음날 다시 만나면 히 웃어버리고 “병화, 다시 한 잔 하자” 하는 성격의 시인이었다. 참으로 좋은 시질(詩質)을 가지고 좋은 지식을 가졌던 시인인데 무정하게도 먼저 떠나버렸다.
박인환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인환은 이러한 지저분한 이야긴 하지 않았다. 항상 흥분해 있었고, 항상 매서운 감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오로지 시(詩), 시의 멋을 부리고 있었다. 탁주를 마시되 귀족처럼 마셨고, 복장을 걸치되 멋쟁이로 걸쳤었다. 항상 누구에게 지기 싫은 그의 성격, 그도 지금은 곁에 없다.
한번 이런 일이 있었다. “병화! 너 기분 나쁘다. 넌 왜 김광주씨만 만나면 그렇게 좋아하니” — 물론 그도 김광주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러나 자기와 같이 있는 시간이 없다는 불평 아닌 불평이었다. 그는 여간해서 다른 사람에게 돈 얘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겐 “병화! 돈 있어” 하는 다정한 벗이었다. 수영이나 인환이나 술이 들어가면 시를 읽는다. 눈을 척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반 배우가 되어 시를 읽는다. 멋으로다. 지금은 이런 벗도 없다. 인환은 이 무렵 신시론(新詩論)이라는 동인지를 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리적으로 그룹이라는 걸 싫어했었다.
이봉구씨나 이진섭(李眞燮)이가 나타난다. 봉구씨의 재치있는 이야긴 술집의 일미였다. 어떻게나 재치있는 이야길 하는지 폭소가 터지곤 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선량한 문학의 선배, 씨도 지금은 기운이 없어 자주 나오질 않는다.
진섭의 주정 또한 대단했다. 그는 통금시간이 될수록 술을 찾는다. 끌고 나오려 해도 기운이 장사다.
“임마, 술 한 잔 더해” — 취하면 누굴 보나 임마다. 이럴 땐 슬그머니 먼저 나와버리는 게 제일이다. 우리가 다 없는 걸 알면 고요하게 실로 얌전하게 모든 걸 다 잘 꾸려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곧잘 자동차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진섭은 그러한 서울 사람이다.
이 집에서 화가들도 많이 만났다.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씨, 이봉상(李鳳商)씨, 그리고 최모(崔某)씨. 김환기씨는 지금 뉴욕에서 활약을 하고 있고, 이봉상씨는 한 달 전에 벌써 작고를 했다. 이봉상씨는 경성 사범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세상 무상, 53세로 세상 떠나다니.
최모씨는 항상 멋있는 고급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러나 늘 이야긴 없는 이야기다. 가난한 이야기다.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나도 대단히 취해 있었다. 집으로 같이 가자는 거다. 나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뜨리에도 볼 겸 같이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동행했다. 가본즉 알뜰한 귀족의 살림이었다. 집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장작도 잔뜩 쌓여 있었고 가구들도 고급, 아뜨리에엔 아름다운 그의 그림으로 가득한 게 아닌가.
그날 밤,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그의 부인과 그의 장모와 그와 한 방에서 넷이 나란히 자고 나왔다. 불을 땐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나올 때 그의 아뜨리에에서 꽃을 그린 정물(12호)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 전날 학교에서 받은 보너스를 봉투째 요 밑에 밀어 넣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