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53호 (『왜 사는가』)👁️ 조회수: 2,342 views

내가 좋아하는 풍경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그때가 보통학교 6학년이었다. 한번은 강당에 새로운 그림들이 새롭게 장식되던 날, 나는 그만 벌을 섰다. 반장에다가 전교 최고 모범생이었던 내가 벌을 서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림에 정신이 팔려 창가 선생의 기분을 아주 상하게 한 거다. 그때 우리는 음악을 창가라고 해서 배웠다. 창가는 피아노가 한 대 있는 텅 빈 강당에서 꼭 있었다. 이 텅 빈 강당에 벽마다 새로운 그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원색판 양화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니 신기하고 아름답고 황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을 꼬박 그림 앞에서 벌을 섰다. 창피한 마음 견딜 수가 없으면서도 구매구매 시야를 넓혀서 종이 날 때까지 그림을 흠뻑 마셔들였다.
종이 나고, 수업이 끝나자 창가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 “임마, 너는 간판장이가 되려고 그러닛.” 나는 멍멍 아뜩하였다.
초기에 나를 매혹시킨 화가는 밀레였었다. 「이삭을 줍는 여인」, 「만종」, 「씨를 뿌리는 사나이」 등, 기도와 같은 아름다운 농민들의 인생이 시처럼 가슴에 왔었다. 그 후 나는 빈 시간이 있으면 꼭 강당을 찾았다. 그리곤 밀레의 「이삭을 줍는 여인」 앞에 황홀히 섰었다.
나는 본래 농촌 출신이기도하다. 그러한 어렸을 때의 여러 잠재의식들이 그곳에 아롱아롱 어려든거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본래부터 따지는 거, 이론적인 거, 억지를 부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중학교에 들어가 나는 미술부에 적을 두었다. 운동 연습이 없는 공일날 같은 날엔 부원들에 끼어 스켓치를 하러 한강이고, 뚝섬이고, 도봉산이고…… 따라다녔다. 그러나 나는 풍성한 풍경보다 가난하고 앙상한 서정적인 풍경이 좋았다. 외떨어져 있는 풍경, 적적하고 수줍고 맑고 아름다운 정경이 좋았다. 따라서 나는 몰려다니며 그리는 것을 싫어했다.
학년이 올라가서 나는 마네보다 모네를, 세잔느보다 본나아르, 고흐를 현대파보다 르노와르의 풍경화나 뒤피를 좋아했다. 그리고 애수에 가득히 찬 모딜리아니의 인물화들을 좋아했다.
등등, 그림을 좋아하는 취미는 나를 그러한 풍경들 속으로 성장시켰다. 구라파 여행에서, 희랍•이집트를 비롯한 동남아 여행에서, 그리고 아메리카 여행에서, 주로 내가 즐겨 찾던 곳은 미술관이었다. 그 황홀한 천재들의 작품들을 보고 여독을 풀곤 했었다. 특히 파리에선 로댕의 박물관을 보고 놀랐었다. 그리고 뉴욕에서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칸딘스키의 색채엔 황홀함보다도 놀라움을 느꼈었다.
이렇게 그림을 좋아하는 생활은 나를 자연 속으로 이끌고 나갔다. 나는 자연을 사랑한다. 그 깊이를 사랑한다. 그 넓음을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그 공적무한(空寂無限)의 충만을 사랑한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연 속에서도 외떨어져 있는 공적무한의 충만! 적적하고, 소박하고, 좀 가난하고, 쓸쓸한 충만이 가득한 그러한 자연을 사랑한다. 나와 같이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고, 편히 그 속에서 쉴 수 있기 때문에, 온 생존의 세계에서 꼭 나를 닮았기 때문에.
때문에 나는 정돈된 정원, 인공이 들은 자연, 풍성한 산림, 거센 파도, 물결치는 바다…… 등등은 견디기가 어렵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그 기하학적 정원을 보고 얼마나 갑갑증과 구속감을 느꼈는지, 지금도 생각을 하면 갑갑하고, 답답하고, 구속감에 젖어들곤 한다.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그 정밀한 정원이.
내가 좋아하는 풍경! 잔잔한 잡목림(雜木林), 둑 가의 미루나무 숲, 강가의 앙상한 나무들, 깊은 산속에 외떨어져 있는 나무, 나무들. 인적이 드문 길, 신작로, 개울에 걸려 있는 다리, 과수원…… 이러한 것들의 늦은 가을 풍경, 그리고 깊은 겨울 풍경, 그리고 이른 봄 풍경, 이렇게 나열을 해보아도 마음에 다 차들지 않는다. 가득히 차 있는 것은 잎 떨어진 가을 풍경들, 눈 속에 아물거리는 차가운 겨울 풍경, 그리고 흐린 날이 자욱한 2월 풍경이다.
아, 공적무한의 충만! 그 생명에 취한다.
앙상하고 자욱한 사람, 때 묻지 않은 쓸쓸한 자연, 그곳이 나의 정신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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