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52호 (『왜 사는가』)👁️ 조회수: 2,505 views

첫 출강

1955년 가을 학기이다. 그러니까 1953년인가, 부산에서 서울로 수복하여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 서울로 수복해 온 대학들은 마구 뽑은 학생들을 다 수용 못하여 바라크로 강의실을 지어놓고 어수선하게 강의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길에서 우연히 백철(白鐵) 선배를 만났다. 백철 선생은 그 당시 중앙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으로 계셨는데, 동경 고등사범학교 나의 선배이시다. 만나자마자 제2학기부터 중앙대 문리대 시론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없으니까 못 나갑니다.”고 대답을 했더니, “뭘 못해, 그냥 시 쓰는 이야기 같은 거 하면 되지.” 강요하다시피 하시며, 소설론은 고(故) 최인욱(崔仁旭)씨가 맡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시간표를 짜놓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9월에 들어서 각 대학은 강의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출강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시를 쓰는 사람이 대학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강의한다는 말인가. 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시인의 고통스러운 세계이며, 어떻게 보면 그 사회에 맞지 않은 이단자들의 폭언•역설•도피•야유•비판 아니면 스스로의 패배, 그 부조리의 내면생활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그 시인이 속하고 있는 현실을 훨씬 뛰어넘는 꿈, 그 이상 같은 세계를.
당시 나는 제4시집 󰡔인간 고도(人間孤島)󰡕를 내고, 극단적으로 소외된 군중들의 고독을 역사의 낙오자처럼 읊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말하자면 노선을 잃은 고독한 서부(西部)가 어떻게 강의실에서 강의를 한단 말인가. 행복하지 못한 인생관, 행복하지 못한 생활, 행복하지 못한 철학, 꿈이 좌절된 역사의 피해자로서.
한 달쯤 지나서 백철 선생께서 꾸지람이 왔다. 하는 수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중앙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 4학년 현대 시론 강의실을 찾아갔다. 그러니까 1955년 10월, 때마침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생각한 대로 바라크로 되어 있는 강의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강의실은 어두 컴컴했다. 강당에 올라 학생들을 내려다보니 4~5명, 그 4~5명 속에 허름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중절모(中折帽)를 쓰고 턱 버티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그 중절모는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그러나 벗으라고 할 수도 없고, 모자를 쓰고 있으나 마나 하는 생각에 그냥 강의를 시작했다.
“시라는 것은 시인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서 고름처럼 터져나오는 말들입니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선……” 이렇게 시작을 한 것이 학생들이 안 보일 정도로 강의실이 캄캄해졌다. 해서 “오늘은 이만……” 하고 단에서 내려왔었다. 단에서 내려오자마자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겁이 나셨지요?” 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이 지금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과장인 최진우(崔鎭宇) 박사, 나는 학생들에 끌려 비 내리는 흑석동 목로주점으로 갔었다.
취기가 들자 “황송한 짓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겁나게 하려고 한 짓입니다.” 하고 최 교수는 껄껄거리며 털어놓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그날 어떻게나 술을 많이 마셨던지 최 교수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최 교수는 사제지간을 떠나서 한 인생의 동료, 동반자로서 이 험악한 인생을 즐겁게 살아온다. 구멍난 중절모의 이야길 하면서, 허름한 바바리코트 이야길 하면서, 그러나 지금의 최 교수는 한 나라의 중요한 학자요, 교수요, 소설가요, 신문 제작자로, 이 사회의 큰 등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근면, 그 의리, 그 유머, 그 성의, 그 풍부한 인정, 온 생명을 다하여 인생을 개척해가는 그를 어찌 옛 제자로만 볼 것인가. 실로 그에게서 인생을 배우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학에서의 나의 첫 강의, 그 강의실엔 윤재천(尹在天) 교수, 수필가 김종훈(金鍾塤) 박사, 중앙대 교수 최민(崔敏),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갑천(朴甲千)제씨도 있었다. 참으로 친숙했던 강의실, 지금은 그러한 유머가 있는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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