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즐거웠던 시절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서울 고등학교로 교단의 자리를 옮긴 것은 1949년 2월 7일인가 한다. 그때 서울 고등학교는 6년제 서울 중학교였으며 이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우수한 편입생들이 많았었다.
그 전에 나는 지금의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교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물포 고등학교도 6년제 인천 중학교였었다. 이 학교에도 이북에서 넘어온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었다.
공교롭게도 이 두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다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출신들이다. 인천 중학교 길영의 교장 선생은 역사과 출신이고, 서울 중학교 김원규 교장 선생은 영문과 출신이시다.
나는 경성 고등 사범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해방을 전후해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국대안(國大案) 반대 소동을 피해서 인천 중학교에서 일 년 반쯤 있다가, 이곳도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을 해서 당시 서울 중학교에서 생물을 담당하고 있었던 나형섭 선생을 찾아갔던 것이다. 나 선생은 경성 사범학교 나의 선배였다. 나 선생이 소개해 주신 분은 그때 서울 중학교에서 물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이근무 선생이었다. 이근무 선생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물리과 출신이라 김 교장의 후배이기도 하다. 지금은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있지만, 이 선생의 소개로 김 교장을 만나게 되었다.
첫눈에 김 교장은 참으로 멋장이였다. 키가 후리후리 크시고 곤색 양복을 입으신 모습이 그러한 인상을 나에게 주었었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왜, 인천 중학교를 그만 둘려고 하지, 그 학교도 아주 훌륭한 학교이고, 길 교장하곤 평양 고등 보통학교와 히로시마 고등 사범학교 동기 동창인데……” 나는 이 말을 듣자 이것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 동창들인데 나를 써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마디 답은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해서 “가옥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하곤 말을 그쳐버렸다. 그랬더니 한 일 분쯤 지났을까 “그럼 내일부터 이 학교에 나오지.”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뜻밖의 일이었다. 그 후 김 교장하고 생활을 같이 해 보니 그분의 성격이 그렇게 청결하고 직관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 학년 문과 물리를 담당했다. 첫 시간에 첫 질문을 했던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 수학 같은 것이 인생에 그리 필요한 것입니까?” 지금 텍사스 대학 철학 교수로 온 세계에 알려져 있는 승계호라는 사람, 물론 그 질문은 나를 떠보려는 속셈이었던 걸 나는 알고 “나의 머리는 지금 금이 간 다이아몬드다.”라는 좌절된 나의 꿈의 세계를 이야기함으로써 답변 아닌 답변을 했던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제1회 졸업식이 있었고 또 신학기가 시작됐다. 1950년 4월 신학기가 얼마 진행되지도 않고 6•25동란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서울고등학교 생활은 1959년 3월까지 10년간 계속이 되었다. 한 번의 결근도 없이. 이동안 1955년 가을부터 중앙대학교 시간강사로 현대 시론을 맡기도 했다. 1958년부터 경희대학교 전임(專任)으로 오라는 일도 있었지만 나는 10년을 이 서울고등학교에서 있었던 것을 내 인생의 기록으로 삼기 위해서 1959년 4월 학기부터 경희대로 가는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렇게 10년 동안 서울고등학교에 있으면서 나는 가르치는 과목을 세 가지를 가졌었다. 먼저는 물리, 다음엔 대수, 다음엔 국어 작문. 이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허락해 주신 김원규 교장에게 항상 감사를 하면서 실로 머리 좋고, 깨끗하고, 좋은 가정의 영재들과 같이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지냈었다. 한때는 ‘비실비실’이라는 별명으로, 한때는 ‘고깃덩어리’로 그리고 ‘술통’이라는 별명으로 ‘비실비실’은 교장 선생님이나 선생님들을 너무 무서워해서 비실비실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했다가 얻은 별명이고, ‘고깃덩어리’는 고깃덩어리같이 살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가 얻은 별명이었다. ‘술통’은 부산 시절 통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얻은 별명이다. 이 별명을 지어 준 학생이 그리울 때가 많은데 그 학생은 통술을 술통으로 읽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