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 대
나의 20대! 한 마디로 말해서 시간을 달리는 긴장한 말 탄 기수라 할까, 그렇게 직선적으로 바쁜 시절이었다. 꿈으로 꿈으로 일직선으로 질주를 하던 때, 지금 생각해 보면 실로 충만한 학창 생활로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성숙과 성취의 계절이었다.
나는 보통학교(지금의 국민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심취되어 여러 전시회에 뽑혀 다니게 되었었다. 그리고 보통 학교 대항 시합에 릴레이 선수로 출전하여 우승도 했다. 그리고 항상 학년에서 수석도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졸업하자마자(서대문에 있는 미동 공립 보통학교) 지금의 을지로 6가에 있었던 경성 사범학교 보통과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 그 학교에선 운동부와 학술부에 꼭 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운동부엔 육상 경기부에, 학술부엔 미술부에 들어갔다. 육상부에선 단거리 종목을 선택하여 2백 미터, 4백 미터를 연습하고 미술부에서는 기초적인 실기를 상급생들 틈에 끼여 공부했다. 일요일 같은 날엔 교외의 스케치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작고하신 이봉상 선배가, 5학년에 있었다. 이봉상 선배는 그때 이미 선전(鮮展•일제시대 총독부 주최 전 조선 미술 전람회)에 특선을 하고 있었다. 선전은 지금의 국전 같은 것이어서 당시 가장 권위있는 전람회였다.
경성 사범학교는 입학 때 일본인 80명, 조선인 20명을 뽑는 학교라서 한국 학생이 드물었다. 육상부에 들어간 나는 해마다 열리는 전국 남녀 중학교 학년 대항 육상 경기의 2백 미터, 그리고 1천 6백 미터 릴레이에 학년 선수로 출전하곤 했다. 그러던 중 윈터 스포츠로 되어 있는 럭비부에서 회원 모집을 했다. 나는 그때까지 럭비공이 타원형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2백 미터, 4백 미터에서 주력이 있다는 이유로 럭비부에 거의 강제로 입회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가을 학기부터는 럭비부에 들어서 그 생활을 또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경성 사범학교는 전 일본에서도 유명한 럭비 학교였다. 나는 몰랐지만 내가 들어가기 전에 전 일본에서 3년을 연거푸 우승을 한 그러한 강한 럭비 스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럭비라 하면 양정•배재 학교, 그리고 전문학교로선 보성 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꼽는다. 그러나 그 당시엔 가장 강한 팀이 경성 사범학교였다.
나는 이러한 강한 팀의 윙으로 2학년부터 시합에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3학년부터는 자연히 미술부 생활은 중단되었고 교실과 기숙사, 운동장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참으로 시간이 귀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 원정도 하고, 요즘 말로 크게 매스컴도 타고, 한점 후회없이 럭비를 통해 운동부 생활도 만끽했다. 그 충만, 그 자신, 그 멋.
흔히들 말하길 요즘 운동 선수들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시대, 사회, 환경, 모든 것이 다 달라졌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었다. 공부는 공부대로 시합하는 것처럼 열심히 하고, 운동은 운동대로 우승을 목표로 열심히 했다. 제 자랑하는 사람을 보고 네가 양주동(梁柱東) 박사냐 하는 말이 있지만, 이러한 맹렬한 운동 생활 속에서도 좀 부끄러운 말로 전 학년 내내 수석을 했다.
운동과 공부, 그리고 자기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그러한 것이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러한 기세로 나는 일본 동경 고등사범학교(지금의 쓰쿠바 대학) 이과로 진학하여 물리화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몇 사람밖에 뽑지 않는 이 학교에 입학이 되었을 때 참으로 생전 처음 인생의 한 봉우리를 정복한 듯 느꼈다.
이 학교에 입학하고선 공부에만 열중할 생각이었다. 운동은 그만하면 충분하지 하는 생각으로. 그러나 경성 사범 학교 선생이며 럭비 감독으로 있었던 시오사끼라는 선생이 나의 동경 고사 합격 기념으로 자기의 럭비 유니폼을 내주며 ‘동경 고사에서도 꼭 럭비를 해 주길’ 하던 그 의리 때문에 나는 다시 럭비선수 생활을 아니할 수 없었다. 얼마나 바빴던가. 이과, 특히 물리 화학의 공부는 강의와 분필만 가지고서 되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차분히 시간을 집중시키는 실험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기숙사, 강의실, 실험실, 운동장을 직선으로 왕래하면서 동경 고등사범학교라는 100년이 넘는 학풍을 마시는 학창 생활이었다. 모든 것이 높고, 순결하고, 숭고하고, 순수한 청춘과 학문, 꿈의 물결이었다.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수재라는 수재 속에 끼어 나는 속으로 움터오르는 내 자신의 세계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경작하고, 넓히고, 내 자신을 뿌리는 그 작업. 무한한 세계 속에서 나는 순수한 대망의 씨앗을 안고 날마다 나를 응시하는 생활을 했다.
로망 롤랑, 폴 발레리, 말라르메, 릴케, 헤르만 헤세, 한스 카로사, 프란시스 잠, 위로 올라가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 등등 낯선 이름들의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끝없이 넓은 사색과 정감의 하늘을 열어 가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가장 널리 읽힌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었다. 나는 특히 로망 롤랑이 쓴 위인전 즉 베에토벤의 생애, 톨스토이의 생애, 슈베르트의 생애, 밀레의 생애, 괴테에 관한 서적 등을 깊이 읽었으며, 슈바이처의 자서전 같은 것에서 많은 공감을 받았었다. 특히 퀴리 부인전 같은 책에선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그 자연 과학인으로서의 태도 같은 것을 배우곤 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항상 줄기차게 내 영혼의 세계를 흘러내리고 있었던 고독감, 그것은 항상 나의 영혼의 밀실을 밝히고 있었던 등불이 아니었던가. 항상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며, 현실의 불안에 떨던 그 초조했던 동경 시절, 내면의 어둠과 외부의 공포 속에서 나는 항상 시들지 않는 푸른 계곡을 가슴에 안고 혼자서 혼자서 그 생명의 계절을 이겨 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나에게 있어 그 종말은 실로 허망한 해방과 좌절, 새로운 방황으로 이어져 모든 길이 달라져 버렸다. 그 연장 끝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