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41호 (『떠난세월 떠난사람』)👁️ 조회수: 2,978 views

명동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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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주·이봉구·박인환·이진섭·박기원·김수영·유호·조영암·임긍재·이명온·이해랑·이인범·
윤용하·한노단·김영주·이순재·박연희·최정희·박계주·안수길·이헌구·김광섭·양주동·이하윤·
이무영·오영진·유치진·김광수·전봉초·김관수·박기준·김영주·김환기·도상봉·윤영자·김진수·
최요안·박화목·장수철·서항석·변영로·장덕조·조지훈·천경자·이마동·이종우·오종식·오소백·
조흔파·이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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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시절 우리들은 초기엔 ‘모나리사’에 모였었다. 그러나 문인들이 모이는 곳은 영업이 안된다고 해서, 그곳에서 쫓겨난 뒤엔 마침 그때 개업을 시작한 ‘동방문화살롱’으로 대거 이동을 했다. 차를 마시지도, 팔아주지도 않기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는 건 뻔한 노릇이었다. 돈없이 온종일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까 미움을 받을 수밖에, 레지나 카운터에 앉아 있는 종업원들은 그렇게 온종일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있는 문인들을 ‘석고상石膏像’이라고 했다. 실로 석고상들은 슬펐다. 돈도 없고, 원고료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차를 사는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동방문화살롱’,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차를 안 마시고 온종일 앉아 있어도 마음이 편안했다. 문인들, 예술인들을 위해서 개업을 한 곳이였으니까. 말하자면 문인, 예술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문화사업의 하나로 시작을 했다고 하니까. 주인 김 사장은 2, 3층 빌딩의 주인이며 2층은 사무실 겸 사진보도의 제작실로 사용을 하고, 1층은 완전히 문인, 예술인들을 위한 휴식공간인 그 다방이었다. 그러니까 다방은 완전히 수입 계산을 떠난 봉사, 그 문화사업이라 했다. 참으로 많은 문인, 예술인들이 제 집 사랑방처럼 출입을 했다. 우선 나는 김광주씨(소설가, 당시 경향신문 문화부장)의 명동가족의 한사람으로 매일 이곳에서 사는 냄새를 맡았었다. 이봉구(소설), 박인환(시인), 이진섭(방송작가), 박기원(소설, 이진섭씨 부인), 김수영(시인), 유호(소설, 방송작가), 조영암(시인), 임긍재(평론), 이명온(수필), 이해랑(연극, 예술원회원), 이인범(성악), 윤용하(작곡), 한노단(극작가), 김영주(삽화가), 이순재(삽화가), 이러한 김광주씨를 중심한 문인, 예술가들과, 박연희(소설, 예술원회원), 최정희(소설), 박계주(소설), 안수길(소설), 이헌구(평론), 김광섭(시인), 양주동(시인, 학자), 이하윤(시인), 이무영(소설), 때때로 오영진(극작가), 유치진(극작가), 그리고 김광수(첼로), 전봉초(첼로, 예술원회원, 예총 회장), 김관수(연극), 박기준(평론, 외국문학), 김영주(서양화), 김환기(서양화), 도상봉(서양화), 윤영자(조각), 김진수(희곡), 최요안(방송작가), 박화목(시인), 장수철(시인), 서항석(희곡), 변영로(시인), 장덕조(소설), 조지훈(시인), 천경자(동양화), 이마동(서양화), 이종우(서양화) 실로 무수한 얼굴들이 안개 같은 기억을 뚫고 솟아오른다. 이마동 씨는 당시 보성고등학교 교감이어서 늘 서명원 교장과 같이 토요일 저녁마다 나타나 우리들 싸구려 술을 마시는 문인들에게 고급한 일본식당에서 근사하게 대접해 주곤 했다. 물론 돈은 서교장이 담당했다. 위에 열거한 명단에서 빠진 문인, 예술가들도 많을 것이다. 거진 장안의 문인, 예술가, 그리고 언론인들이 수시로 출입을 했었으니까. 오종식씨(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 오소백씨(당시 어느 신문인가의 사회부장), 조흔파(소설, 당시 경기여고 교사) 곰곰이 생각하면 끊임 없이 이어져 나오는 이름들, 참으로 어지럽던 시절을 함께 생존을 나누던 그리운 얼굴들이 아닌가.
그 시절은 제대로 집필실 같은 걸 가지고 있었던 문인들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다방이 집필실이요, 응접실이요, 원고와 고료를 서로 교환하는 곳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이러한 광경이 벌어졌었다. 우리들의 보스였던 김광주씨는 거의 그 청탁원고를 다방에서 집필을 했었다. 수필이고, 소설이고, 연재소설이고, 할 것 없이. 김영주씨, 이순재씨도 소설의 삽화들을 다방에서 그리곤 했다. 각자 각자 전화들도 집에 가지고 있지 못했던 시절이어서 이렇게 다방이나 술집은 모든 생활의 연락처 구실을 해주었었다.
근방에 있었던 작은 술집, 큰 술집들이 거진 돈들이 달랑달랑하는 문인, 예술가들로 우글거렸다. 그리고 그곳에 가득히 차 있었던 대화들은 문학이요, 음악이요, 그림이요, 연극이요, 예술들이었다. 정치나, 경제, 잡스러운 세속적인 말들은 들은 일이 없었다. 다방이 그러했고, 술집이 그러했고, 말하자면 어디나 문학과 예술의 세미나 장소 같았다. 이렇게 보면 그 시절의 명동은 하나의 예술과 인생의 대학촌이었다. 실로 활기찬 대학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들 동방문화살롱을 중심해서 명동대학촌을 출입하던 문인, 예술인들은 요새말로 명동대학교 동방문화살롱 캠퍼스의 인사들 이었다.
‘갈채’ 캠퍼스의 인사들, ‘명천옥’ 캠퍼스의 인사들, 그리고 기타 소수 다방 캠퍼스의 인사들, 대한민국의 문인, 예술가 처놓고 이곳 명동대학촌을 출입 안 한 인사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문학청년시절을, 문학장년시절을 보내면서, 인생의 깊은 철학을, 문학을, 향기높은 예술을 습득했던 것이다. 벗들에 엉겨서, 생활에 엉겨서, 그 생존의 현장에 엉겨서. 지금 명동은 변했다. 상품의 거리로, 돈의 거리로, 살벌한 실존 그 경제의 거리로,
이 글을 마침에, 실로 그리운 것들은 네 돈, 내 돈 할 것 없이 서로 엉겨서 술집에서 지내던 어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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