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그리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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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조연현·곽종원·박목월·최인욱·박용구·김광식·이범선·곽학송·박기원·김윤성·김광주·이해랑·한노단·이봉구·윤용하·이인범·전봉초·박인환·이진섭·김수영·조영암·조지훈·박연희·김진수·박고석·김환기·장욱진·유호·김영주·이순재·이명온·조애실·조경희·최요안·이헌구·안수길·이하윤·박진·
김광섭·이무영·박계주·김내성·유두연·황순원·양명문·김동진·최정희·손소희·박화성·박영준·이원섭·오영수·이형기·허윤석·전광용·정한모·정한숙·김광섭·모윤숙·김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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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많던 술집의 이름들, 주모의 이름들을 다 잊었지만, ‘향원’이니, ‘봉 소아’니, ‘뉴나이야가라’니, ‘블랙스톤’이니, ‘카리레오’니, 퇴계로의 ‘포엠’이니,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이름들이다.
‘명동장’ ‘무궁원’ ‘은성’ 등은 주로 동동주와 소주, 빈대떡·동그랑땡·생두부·동태찌개 등 손쉽게 돈없이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던 술집들이었다. 그 주모들의 고마움, 외상으로 외상으로 그어주던 그분들, 지금은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외상값은 밀렸어도 그분들 덕택에 한국의 문학, 한국의 예술들은 자랐던 거다. 고마운 사람들,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 무렵엔 술집이 그대로 시의 낭송장이 되었고, 노래의 장소가 되었고, 연극대사의 연습장이 되었고, 술이 들어갈수록 명동의 이 집 저 집 술집마다 노래이고, 시이고, 연극이었다.
통금시간, 그 사이렌은 명동 술집들의 인생극장의 막을 내리라는 신호였지만, 도취해들어갈 땐, ‘반 되만 더, 반 되만 더’ 다급히 술주전자가 돌던 때도 된다. 동동주 반 되, 그 주전자가 유행이었다. ‘반 되만 더’이 말은 김광주씨의 말이었다. 이것이 이렇게 어느 술집에서나 유행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 청춘은 정에 엉겨, 인생 동반의 바닥의 정에 엉겨 지녔던 거다. 밤깊도록 가난한 명동에서.
명동 입구에 있던 ‘명천옥’은 달랐다. 술 마시는 그 분위기는 흡사 매일밤 단합대회라도 여는 거 같은 여느 조직 같은 분위기였다. 그곳에 질서가 있었다. 선후배간의 서열이 있었다. 문단데뷔가 언제다, 누구의 추천이다, 누구와 동향이다, 이런 식의.
이곳에선 매일밤 술값을 걷었다. 이걸 그날 밤의 주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 술, 자기가 마시고 가는 거다. 소위 요즘 말로 정확한 ‘더치 페이’였다. 우리들 주위에선 돈 있는 사람이 내곤 했기 때문에 돈 없는 사람은 매일밤 공짜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 ‘명천옥’에선 그것이 허용이 되질 않았다. 반드시 회비를 내야 했다. 회비를 내고 마시는 술,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한 면도 있었지만, 너무나 사무적인 냄새도 났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 있어선 뒷맛이 깨끗한 점도 있었다. 공짜인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간혹 이곳에 들렀기 때문에 자세히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주로 김동리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서정주·조연현·황순원·곽종원·박목월·최인욱·양명문·김동진·김광식·이범선·곽학송·김윤성·최정희·손소희·박화성·박영준·이원섭·오영수·이형기·허윤석·박용구(소설가)·전광용·정한모·정한숙, 때로 조지훈, 그러니까 이곳은 주로 문예 현대문학 그리고 한국문협을 둘러싼 문인들의 주식 주점이었다. 거의 매일처럼 이 술의 주식은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문단이 견고히 형성되어갔다.
이렇게 ‘명천옥’을 중심한 문인들이 한국문단의 주류를 이루어가자 이것에 질투인지, 시기인지, 헤게모니인지, 이무영·김광섭·이헌구·모윤숙·이하윤·박계주·안수길·김종문, 이런 사람들이 발기를 해서 또하나의 문인단체를 결성했다. 그것이 한국자유문학자협회였다. 그 회장이 김광섭 시인이었고, 박계주 소설가가 사무국장을 했다. 이 단체는 그 후 자유문학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해서, 현대문학처럼 추천제로 인해서 많은 신인 소설가·시인·평론가·희곡작가들을 배출해 갔다.
이렇게 되자 문단은 완전히 두 갈래가 되었다. 영남파다, 함경도파다 하는 말이 명동에 번지기 시작했다.
두말할 거 없이 영남파는 한국문인협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함경도파라 함은 한국자유문학자협회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술집으로 말한다면 명천옥파와 비명천옥파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김광주씨를 중심한 우리 인생 ‘호적이 없는 가족’들은 무엇이던가. 그건 조직을 싫어하던 인간들의 무리, 그 선량한 명동파, 그것이 아니었던가. 정에 엉겨 고독한 시대를 살던.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국산영화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국산영화의 붐을 타고 영화인들이 돈을 만지게 되었다. 돈이 몰려들었다. 떼돈을 벌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문인들이 마시던 술집들이 하나하나 영화인들에게 점령당해갔다. 동동주 싸구려 술집으로부터 양주를 파는 고급바·캬바레 등에 이르기까지, 영화인들의 출입이 빈번해갈수록 호주머니가 가벼운 문인들은 그 자리를 그들 흥청거리는 영화인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문인들은 다옥동의 깍두기집으로, 무교동의 용금옥으로, 심원집으로, 청진동의 해장국집으로, 빈대떡집으로, 조선일보 뒷골 목에 있던 ‘아리스’다방으로, ‘청하’다방으로, ‘은하수’다방으로, 그 근처 방송회관 부근에 있던 수많은 작은 술집들로 분산 이주하게 되었다. 기실 한국시인협회의 창립도 ‘은하수’다방이 그 산실이었으며, 그곳이 사무실 구실도 한 거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문인·예술가들은 상업인들에게 그 영혼의 보금자리였던 명동을 내놓게 된 것이다. 1960년 초반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