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그 고개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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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범·장이욱·김원규·조영식·박종화·김동리·서정주·조연현·황명·김시철·원종성·구인환·김해성·
성춘복·오인문·이상범·이유식·이철호·김신철·홍승주·이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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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후 나는 그동안 모았던 원고료를 밑천삼아 고향에 내려가 살려고 어머님 묘막 편운재(片雲齋) 옆에 화실을 하나 증축했다. 이름하여 청와헌(聽蛙軒). 주위에 개구리가 많이 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향 가꾸기의 출발로 국도 45번 도로가에 버스 정거장을 지었다. 정거장 위에 깃봉을 세우고 꿈이라는 깃발을 달아놓았다. 마을학생들, 아동들에게 역시 꿈이라는 깃발을 하나씩 나누어주어 공부방에 걸게 하고, 온 마을이 꿈을 가지고 살자고, 그 정신운동을 폈다. 그리고 버스 정거장 옆에 작은 운동장을 하나 만들어놓고 농구틀을 설치했다. 그리고 마을 비각을 수리했다. 이렇게 우선 고향마을의 틀을 좀 생기있게, 참신하게, 문화적으로 정리해나갔다.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는지, 계속해 나갈 생각이지만, 나의 여생은 그렇게 고향과 더불어 진행해 나갈 것이다. 이렇게 다짐을 한다.
그리하여 주말마다 고향에서 지내며 마음껏 정년 이후의 자유를 작품생활에만 몰두하려는 판에 뜻밖에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이라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을 위시 해서(1961년 12월 31일 창립), 김동리·서정주·조연현, 이러한 문단의 대선배들이 번갈아가면서 맡아온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큰 단체가 아니던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거 큰일났구나, 하는 무거운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대의원총회(1989.1.7. 제28회, 233명)에서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형식으로 18대 이사장이 되었지만, 부이사장은 그런대로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황명(黃命) 시인·김시철(金時哲) 시인·원종성(元鍾盛) 수필가·구인환(丘仁煥) 소설가·김해성(金海星) 시인(득표 순위), 이분들이 부이사장에 당선이 되었고, 시분과회장에 성춘복(成春福) 시인, 소설분과회장에 오인문(吳仁文) 소설가, 시조분과회장엔 이상범(李相範) 시조시인, 평론분과회장엔 이유식(李洧植) 평론가, 수필분과회장에 이철호(李喆鎬) 수필가, 아동문학분과회장에 김신철(金信哲) 아동문학가, 희곡분과회장에 홍승주(洪承疇) 희곡작가, 번역분과회장에 이희춘(李熹春)님, 이 역시 무투표로 당선이 되었다. 따라서 전례로 본다면 대단히 평화스럽게, 그리고 간결하게, 그리고 문인답게 대의원총회가 진행되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조직생활을 해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참으로 얼떨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더구나 민주화 물결과 조국 통일에의 거센 정치 물결 속에서 어떻게 이 큰 단체를 평화스럽게, 그리고 진취적으로, 그리고 참신하게, 그리고 화합된 문인단체답게, 이끌어나갈 것인가, 이끌어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실로 외톨로서 살아온 것이 아니던가. 해방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사상적인 이데올로기 물결 속에서, 그 이데올로기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고, 그러한 지식도 상식도 없었고, 싸움이라면 너무나 나는 약해서, 대립이라면 너무나 나는 생리에 맞지 않아서, 그러한 단체라면 더구나 생리에 맞지 않아서 작당이나, 어느 단체를 피해서, 고독한 혼자를 살아온 거다. 그 불길한 안개 같은 생존의 연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