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대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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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현대시인들에 대한 정보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그런대로 대회의 수준을 높여주는 시인들이 많이 참가할 의사를 보내왔다. 영국의 존 실킨(Jon Silkin), 프랑스의 길빅(E. Guilevic), 드기(M. Deg uy), 자유중국의 종정문, 일본의 가와무라 분이치로(河郵文一郎)·아키야 유다카(秋谷豊), 도바시 지쥬(土橋治重), 룩셈부르크의 미모 모리나(Mimmo Morina), 필리핀의 락손(Ariel Lacson), 세네갈의 디아카테(L. Diakhate), 스페인의 파드론(J. J. Padrón), 인도의 크리슈나 스리니바스(Krishna Srinivas), 미국의 프래티(Jeno Platthy), 호주의 존스톤(B. A. Johnstone), 망명시인 라트비아의 오우사라(M. Ausala), 미국의 로이드 스톤(Lloyd Stone), 호주의 콕스(P. B. Cox), 서독의 루돌프 하겔슈탄게(Rudolf Hagelstange), 그리고 미국의 윌킨손(Rosemary C. Wilkinson) 등.
이렇게 되어서 대회의 역원·임원·위원·의제 그리고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예정대로 1979년 7월 2일 오전 10시, 신장개업한 롯데호텔 볼룸에서 개회식을 했다. 당시의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 선생도 참석.
그렇게 신경전을 벌이던 일본에서도 무려 19명이라는 다수의 참가를 보였다. 삼십여 개국 한 200명 외국 시인이 참가를 했다. 그리고 국내 시인 한 500명, 이러한 대집단으로 매우 순조롭게 대회가 진행이 되어 갔다. 그러자 운동권의 일부 문인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다. ‘구속문인 석방’을 외치고 롯데 대회장으로 밀려들었다. 참으로 슬펐다. 외국 시인들에게 미안도 했다. 무마하러 나섰다. 시인대회는 국제PEN과 달라서 그러한 투옥작가옹호위원회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 서로 시를 쓰는 입장에서, 이렇게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잘 되어가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좀 시내에서 먼 곳, 그곳이면 좀 괜찮겠지 하고, 워커힐호텔로, 그러나 그곳까지 와서 서로 잘 아는 얼굴들이 고함을 지르며 투옥작가 석방을 외쳤다. 정치하곤 하등의 관계도 없는 국제적인 회합에서, 나는 빌다시피 해서 무마를 했다. 다행히도 나를 봐서 그랬는지 좀 소강 상태로 이어지면서 예정대로의 행사를 마치게 되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경주로 지방여행을 떠났다.
하늘이 맑고, 산천이 푸르러 경주여행은 더없이 상쾌했다. 경주 불국사 앞에 새로 문을 연 코오롱호텔을 이용했다. 점잖게 저녁만찬을 내준 경상북도 도지사에게 여흥으로 춤을 추게 악대를 더 서비스해달라고 청을 했다. 기꺼이 그 청이 받아들여져 댄스파티로 이어졌다. 그 많은 시인들이 서로 엉겨서 흥겨운 춤들을 벌였다.
다음날이었다. 시인들 일행이 고속관광버스 대여섯 대로 분승하여 서울로 향하는 대회 마지막 날, 폐회식은 롯데호텔 볼룸으로 결정해놓고 있었다. 저녁 7시로,
그러나 서울로 향해서 달려 올라오는 우리 본부에 들어오는 정보는 대단히 불길했다. 롯데호텔 정문에 운동권 문인들이 몰려 있다는 거다. 하는 수 없이 폐회식 식장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제문화협회 회장 김명회(金明會)씨, 부회장 신영철(申泳徹)씨하고 의논한 끝에 그분들의 의견대로 수원 컨트리클럽에서 폐회식을 하기로 했다. 1호차, 2호차, 3호차…… 전단을 보냈다. 차를 수원에서 수원 컨트리클럽으로 돌리라고,
차들이 수원 컨트리클럽 푸른 골프장으로 모여들 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시인들은 기뻐들 했다. 넓고 시원스러운 대자연, 푸른 잔디밭, 이곳에서 폐회식을 한다고 선언을 했다. 나는 즉흥적으로 폐회식사를 했다. 그걸 이준영 시인이 통역을 했다. 밤은 어두워지기 시작을 했다. 다음 제5차 세계시인대회의 개최지를 놓고 여러 말이 나왔지만 나는 나의 판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결정을 짓고 그렇게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 팻말을 다음 회장인 로스매리 C. 윌킨손에게 주었다. 잘 부탁한다고. 사실은 회의기간중 끊임없이 구라파시인들, 특히 미모 모리나를 중심해서 세네갈의 다카르(Dakar)에서 열자는 말이 나왔었다. 그러나 신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늘 들었었다. 확실하게 대회를 열 거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이미 볼티모어대회때 서울대회 뒤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면서 꼭 열리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음 대회는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고 완전히 서울대회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달이 떠오르는 골프장에서 풍성한 바베큐파티가 벌어졌다. 술은 얼마든지, 진로에서 댔다. 고기도 풍성하게 나왔다. 이곳에서 이렇게 바베큐파티로 폐막식을 하게 된 까닭을 어느 누구도 몰랐으리, 모두들 대만족으로 법석이던 그 저녁, 그 송별파티를 즐기고 롯데호텔, 그 투숙소로 돌아온 건 밤 10시를 넘어서였다. 그땐 운동권 문인들도 다 해산이 된 뒤라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아, 슬픈 나라, 언제까지나 이렇게 불안한 상태가 계속될 것인가. 나는 그날 밤 서울로 돌아와서 술인지, 눈물인지, 흠뻑 젖어서 새웠다.
한산해진 남산 사무실에서 대회 정리를 했다. 통장에 돈이 남았다고 김혜숙 시인이 보고를 했다. 하도 고마워서 얼마나 남았느냐 물어보지도 않고, 성춘복 시인과 같이 나누어 쓰라고 했다. 참으로 두 분에겐 감사를 안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어려운 일들을 척, 척, 해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