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접어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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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구·이옥·강문봉·모윤숙·조경희·전숙희·한무숙·홍윤숙·김광주·주요섭·송지영·이무영·
정비석·김용호·문덕수·이영근·전봉건·김요섭·성춘복·김혜숙·김성진·홍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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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제이사로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예술문화국제학술원이 주최하는 제10차 세계시인대회는 1988년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타일랜드의 방콕에서 열렸지만, 참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대회로 되어버렸다. 흥미없는 일이다. 나는 제2회 세계시인대회 때(1972.11.), 대회장 종정문 시인의 초대로 대만대회에 참석을 하여, 그때부터 쭉 그 국제이사가 되어 참석을 하고 있지만, 이젠 피곤해졌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시간적으로나.
제3차 세계시인대회는 1975년 7월에 미국 볼티모어에서 있었다. 대회장은 헝가리의 망명시인 제노 프래티(Jeno Platthy)였다. 프래티도 제2회 대만대회때부터 참석하기 시작한 시인이었다. 키가 크고, 야심 가득한, 활동적인 인상을 주는 시인.
이 대회때 나는 뜻밖에도 제4차 대회의 대회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나는 조직력도 없고, 한국문단에 아무런 뿌리도 없고, 그저 보헤미안처럼 인생을 방황하는 시를 쓰고만 있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즉각 거절을 했다.
그러나 종정문 시인의 간곡한 부탁이 여러 번 있어서 워싱턴 DC에 있는 우리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서 ‘대회를 서울에서 해달라는데 정부로선 어떠한가’를 전화로 타진을 했다. 그러자 몇 시간만에 ‘좋다’라는 회신이 왔다. 하긴 나도 서울의 번영, 그 성장한 모습을 온 세계 시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거다. 그러나 한창 유행처럼 나돌던 ‘……세계대회 서울 유치’, 이러한 말이 웬일인지 나에겐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거처럼.
그러나 이렇게 제4차 세계시인대회는 수동적으로, 실로 수동적으로 서울에서 열리기로 결정을 보았던 거다. 나는 이 볼티모어대회 폐막식에서 나의 딸(뉴욕에서 의사로 있던)의 조력으로, 그리고 그곳 존 홉킨스 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장남 이영근 교수의 부인 배 여사의 번역으로, 웰컴 스피치를 읽고, 서울대회에 많이 참석들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배 여사가 나의 인사말을 영어로 번역해서, 그걸 존 홉킨스대학 도서관에 가서 한 200매 제록스로 눌러 카피를 만들어 전회원에게 돌렸던 거다. 여기서 슬픈 기록을 하나 남기겠다. 그때 나하고 참석한 우리 회원들이 하나 협력을 해주지 않았다는 거다. 영어를 잘한다는 그들이.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성이라 생각할 때 참으로 슬펐다. 한국에 돌아와선 그들이 또한 그들의 공로처럼 떠들어댈 때, 그리고 막상 대회가 열리게 되자, 무어 하나 나서려고 날뛸 때,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이러한 현상이 아직도 남아 있길래 하는 말이다. 피차 약소 민족의 허약성이요, 후진성이며, 슬픈 허세라 말해 두자. 외국어를 잘한다는 거와 문학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되어서 참으로 수동적으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제4차 세계시인대회, 그 대회장으로서 1979년 7월, 약속된 서울대회를 안 치를 수가 없게 되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어떻게 치를 것인가. 대회를 치르려면 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조직을 할 것 인가. 문단조직이 하나 없는 나로서.
문득 전봉건(全鳳健) 시인이 생각났다. 전 시인은 현대시학이라는 시 전문지를 쭉 해오면서 비교적 많은 시인들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전 시인은 그러면서도 비교적 폭넓은 중간세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과, 문인협회이니 한국시인협회이니 한국현대시인협회이니 하는 가운데서도 비교적 편파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잘 가는 시인이라는 생각에, 맨 먼저 전 시인하고 의논을 하면 무언가 풀려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전봉건 시인을 그의 사무실이 있는 서대문 충정로로 찾아갔다. 만나자마자 볼티모어대회에서의 이야길 끄집어내면서 “그러니 당신이 그 사무국장을 좀 해주시오.”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는 “저는 보시다시피 몸이 그 일을 견디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고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김요섭(金耀燮)씨가 어떻습니까?” 했다. 김요섭씨, 그렇지 김요섭씨와 나하곤 부산 피난시절부터 그 정직성에서 서로 통하고 있던 시인이니까, “그럼 그렇게 김요섭하고 의논 해보지요.”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