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화촌 그리고 무교동골목
—————————————————————————–
김광주·이봉구·유호·박연희·이해창·유창돈·백철·최인욱·김원국·김광섭·김진수·황순원·박노춘·남광우·
박창해·김민수·이기문·김동욱·양주동·박영준·이가원·김석득·문효근·전규태·백낙준·
박두진·박목월·김대규·신동파·정현종·정현기·정건영·정영자·강은교·양재연·이을환·이동림·
김기동·전광용
—————————————————————————–
어느 저녁 ‘심원’에서 단둘이 만났다. 박두진씨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자리로 전임자리를 옮기라는 것이다. 나보다도 선배시인이 쫓겨난 자리에 어떻게 내가 갈 수가 있는가, 양심문제이며, 의리적인 문제라는 이유로 극구 반대를 했다. 물론 그 당시엔 보수도 월등히 연세대가 많았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경희대학교를 떠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또다시 ‘심원’ 그 방에서 역시 단둘이 만났다. 한양대학교에서 박목월 교수가 그 자리에 오고 싶다고 하는 이야길 하면서 의리문제 같은 걸 따진다면 같은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서 조형보다는 더할 것이 아니냐며, 꼭 자리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먼저 왜 박목월 교수가 동료가 쫓겨난 그 자리로 옮기고 싶어했는가, 대단히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이번엔 유창돈 교수를 위시해서 몇몇 교수들이 함께 나와서 술을 하게 되었다. 술을 잘 하지 않는 박영준 교수(소설가)도 동석을 했다. 또 그 이야기가 나왔다. 연세대학으로 전임을 옮기라는 이야기.
그러나 나는 기독교대학에 못 간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이유를 첫째 술을 많이 마신다는 거, 둘째 담배를 많이 피운다는 거, 세째 나는 나의 행동에 대해서 강력하게 자제할 수 있는 자신을 못 갖고 있다는 거 등등 인간적인 자유를 생각해서, 박두진씨에 대한 의리적인 것을 포함시켜서 나 자신의 행동의 자유를 내세워 완강히 거절을 했다.
학기가 시작이 되고 박목월씨도 자리를 옮기지 못하고, 결국 내가 그 박두진씨가 맡아 강의하던 현대시론을 하게 되었다. 강사라면, 하는 가벼운 생각이 들어서였다. 현대시론은 3학년, 수필론은 2학년, 일반국어는 상과 2학년, 이러한 강의로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게 되었다. 국문과 3학년에 김대규(金大圭) 시인이 있었고, 상과 2학년에 농구선수 신동파가 있었다. 신동파 선수는 수업시간 한번도 보지 못하고 B학점을 주었다. 그것이 1961년경부터였다. 정현종 시인 정현기 평론가·정건영 소설가·정영자 평론가·강은교 시인 등등이 그 무렵의 졸업생으로 기억된다.
이렇게 나는 유창돈 교수와의 친교로 완전히 내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져버렸다. 국어국문학과 교수들하고 어울리게 된 거다. 마침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거처럼. 하기야 유창돈 교수도 앞에서 말한 거처럼 법을 전공한 사람. 유 교수는 그 무렵 국어변천사(1961), 이조국어사연구(1964), 이조어사전(1964), 이러한 눈부신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늦도록 깊이 술을 많이 마시며 어떻게 이러한 방대한 작업이 계속되었을까, 참으로 엄청난 정력이며, 노력이며, 두뇌였었다. 결국 여러 가지 심적 고통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이미 경희대학교에 제출한 채 1966년 가을 갑자기 서거했다.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 이러한 것이 인생이어라. 유 교수의 박사논문은 1971년 선명문화사에서 출판을 했다. 제목은 조선조어휘사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