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화촌 그리고 무교동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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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전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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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대학의 교수의 일이다. 평소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교수들이 우연히 같은 마루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한 교수가 당시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따가지고 귀국을 했다. 그런데 그 교수는 교수 회의가 있을 때마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박사 박사하며, 박사를 과시하면서, 아니꼽기 짝이 없는 발언을 번번이 해서 모든 교수들이 외면하곤 했다는 거다. 사실 교수사회에선 그리 회의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무얼 더 아는 체하고 쓸데없는 말을 길게 하는 발언자들을 싫어들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 독일에서 돌아온 독일박사는 번번이 회의를 길게 끌게 하는 제 자랑 섞인 말을 끄집어내곤 했다는 거다. 이런 사람은 어느 사회에서도 한두 명쯤은 있는 것을 나도 경험하여 왔지만, 그날 나와 같이 술을 마시러 갔던 이해창 교수(작고, 신문학 전공)도 그러한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의 스포츠맨이었다. 이해창 교수는 학교시절 권투선수였으며, 일본 도쿄에선 상지(上智)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했고, 나라에 돌아와선 신문사 기자생활을 오래 했다. 해방 후까지 신문사 기자생활을 하다가 뜻하는 바 있어서 우선 서울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다. 나는 그때부터 단짝으로 인생을 살아왔지만 이해창 교수는 서울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면서 실은 독일유학을 꿈꾸고 있었던 거다. 이러한 대단한 의지의 사나이, 독일에 가서 역시 신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선 이화대학교에 신문학과를 신설하고, 죽 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느 대학에나 유행처럼 신문방송학과가 설치되어 있지만, 1960년 초기엔 신문학과가 있는 대학이 그리 없었다. 나 자신도 신문학과 개설을 우습게 생각할 정도로 그 학문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거다.
그때였다. 같이 술을 마시고 있던 이해창 교수가 별안간 일어서더니, “너 이놈, 잘 만났다.” 한번 고함을 치자마자 “어, 어, 박사도 때려.” 하는 소리가 났다. 얼결에 돌아다보니 그 독일박사가 한 대 맞고 뒤자빠져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술좌석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좌석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우선 흥분한 이해창 교수를 우리 좌석을 끌어들여놓고, 독일박사에게 고정하라는 말을 던졌다.
우리 일행은 정 마담 집을 나와서 을지로 입구를 돌아 ‘낭만’으로 향했다. 독일박사의 구타사건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시 한잔하러 장소를 옮긴 것이다. “이 교수, 참으로 장하오. 독일 박사를 다 때리니, 자, 그 용기를 위해서.” 이런 식으로 잔을 들기 시작을 했다.
그 후 술좌석에선 ‘어, 박사도 때려’ 하는 말이 유행을 했다. ‘박사, 박사니 한대 더 맞아라’ 하는 식의 유행어가 술집에서의 큰 화제가 되면서 박사를 우습게 보는 풍조가 조성되어갔다.
요즘은 박사학위가 교수가 되는 필수조건같이 되어서, 누구나 박사 학위코스를 밟고 있지만, 진실한 학문연구와 좀 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