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시절과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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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모·정한숙·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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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운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허가가 내려 귀국했을 때에도 맨 먼저 이곳 ‘낭만’에서 위로술을 마셨다. 김광주씨와 같이. 그리고 송지영 선생이 안양교도소에서 8년 몇 개월만인가 고생하시다 특별사면으로 석방이 되어 출옥했을 때에도 이곳 ‘낭만’에서 맨 먼저 위로술을 마셨다. 두 분 다 나에겐 일생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대선배이다. 귀국기념으로 김소운 선생에게 파이프를 선사했고, 송지영 선생에게도 출옥기념으로 파이프를 선사해 드렸다.
송지영 선생은 안양교도소에서 여러 번 편지를 보내주었다. 편지를 받아볼 때마다 나는 정음사 최영해씨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편지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찾아가 뵙질 못했다. 무섭기만 했었으니까.
그 편지들 속에서 여기 하나만 기록해본다. 겉봉 소인이 69.1.18.로 희미하게 남아 있으니, 1969년 정월에 받은 편지이리.
병화炳華 형兄,
나는 속물俗物이라 시詩를 모르기에 시詩라는 것은 인생人生에게 얼마나 값이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시인詩人이라는 족속族屬은 사람 중에 우뜸이라는 걸 항상恒常 느껴 본단 말얘요.
그건 시인詩人 병화炳華가 반하고 싶도록 머찐 탓이죠. 그런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우쭐대진 말아요. 나는 눈·비 나리는 아침, 달뜨는 저녁등 허구헌날 시인詩人 병화炳華가 생각키울적마다 심정心情이 상하여 슬그머니 원망도 해 보거든요. 내가 알기에 시인詩人 병화炳華는 어느 모로나 행복幸福된 사람이요, 행복幸福에 지쳐서 억지로 고독孤獨을 파고들며 자학自虐 비슷이 시詩를, 인생人生을, 마구 씹어 댄단 말야요. 학교學校에서 나오면 여전如前히 명동明洞의 골목골목을 헤매며 노盧마담 집, 학鶴부인 집 찾아들어 스카치나 찐피스쯤 들이키고 삐딱히 파이푸를 물고 앉아 또 쾌활한 웃음을 터뜨릴테지? 그런게 죄 아니꼽단 말야요. 허 허!
객설客說 그만하고 연하장年賀狀 보내줘 고맙구려. 가끔 시詩도 좀 보여주구려. 난 사년四年 동안 어느 대학大學 영문과英文科에 들어간셈 치고 한 십권十卷 독파讀破했드니 이젠 그것도 싫증이 나는군요. 하여何如튼 건강하니 좋지뭐유, 부인夫人 및 문우文友들께 문안,
원문 그대로를 여기 옮겨놓으며 새삼 그분의 너그러움이 생각난다. 송지영씨는 실로 폭넓은 인생을 경험하면서, 실증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사, 바로 그러한 생존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는 일제시대대로 감옥경험을 하고, 해방 후엔 해방 후의 한국 사정에 따라 사형이다, 종신형이다, 어마어마한 형을 받으면서도 불사조처럼 거뜬히 살아가시는 분, 뒤늦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 문화예술진흥원장도, 한국방송공사의 이사장도 지내더니 그도 그만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우여곡절, 파란만장의 생애, 그런데 그것이 하얀 선비로, 혹은 이조백자로, 혹은 백발홍안으로, 작은 부처님처럼 살아왔던 한 생애였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