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崔暎海씨와 그 주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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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씨는 체면치레 같은 거나 세속적인 것을 싫어했다. 가장 예절적이며 세속적인 것을 지키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을 싫어하는 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은 그가 본시 시인의 성격을 짙게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격이 서 있었고, 가장 평민적이면서도 높은 인간의 향기가 짙은 그러한 인격자였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위선적이며, 가면을 쓴 권위적인 인간들이었다.
최영해씨나 나는 무슨 행사날 같은 것을 피하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정월 초하룻날 같은 날, 세배꾼들이 인사를 하러 오기 때문이다. 나야 교수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날을 피한다 해도 가족들이나 제자들, 그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 실례가 되지 않는다 해도, 최영해씨는 큰 회사의 사장이요, 단체의 회장이요,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세배 같은 걸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 같으면 많이 오길 기다리며, 많이 오는 걸 큰 자랑으로, 권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한 세월이다. 그러나 최영해씨는 그러한 걸 부끄럽게,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흔한 주례를 서는 걸 본 일이 없다. 나이로 보나, 사회적 인격으로 보나, 그 명성의 자리로 보나 으레 주례로서 그 자리에 선들 하나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사코 그러한 주례 같은 건 거절해오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시인이면서 주례를 무슨 자랑처럼, 명예처럼, 명성처럼 서오고 있었던 시인이 있었다.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주례를 섰다고 다방에 나와서 자랑을 하는 걸 나는 몇 번이고 보았다. 보면서 참으로 속물 중에서도 속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최영해씨의 세상살이를 극도로 존경해왔다. 그 시인의 말로 그는 백여 번의 주례를 서오고 있다는 거다. 참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었다. 이런 꼴을 보면서 나는 극도로 시를 지키자는 생각이 굳어져 가기도 했다. 최영해씨처럼.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정월을 피해서 최영해씨와 나는 겨울여행을 번번이 떠났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와 최영해씨와 나, 이렇게 남자 셋이 먹을 걸 잔뜩 차에 싣고,
어느 해이건, 12월 30일이나 31일이면 우린 서울을 떠나서 어느 들길, 아니면 산길, 아니면 개울가 길을 달리고 있었던 거다.
어느 해였던가, 서울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원주로, 그리고 담양으로, 다음 날 아침은 담양고개, 죽령인가를 넘어서 풍기로, 이곳에서 송지영 선생 시골댁을 보면서 영주로, 영주에서 봉화로, 봉화에서 동해 울진으로 고개를 넘고 있었다. 그 높은 고갯마루에서 하도 신기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쓴 일이 있다.
봉우린가 하면
고개
고개인가 하면
비탈
비탈인가 하면
봉우리
봉우린가 하면
영嶺
소백小白과 태백太白의 줄기줄기
하늘 넘어
넘어
동해로 향하는
이 산길
분천 마루턱에서 쉰다
커피를 마시며 내려다보면
분천은 물가의 작은 마을
십리를 더 내려 앉은 마을
논밭에서 까마귀, 까치가 논다
내 생전
이곳은 이게 끝이겠지
허, 하늘 보면
분천과 하늘 사이
중천에 내가 있다.
제목은 「중천中天(분천枌川에서, 70.12.27.)」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해는 정월 초하루를 며칠 전에 출발한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