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070호 (『떠난세월 떠난사람』)👁️ 조회수: 3,820 views

최영해崔暎海씨와 그 주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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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 피난시절부터 우연히 친하게 된 여인이 있어서 너무나 외롭던 나머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겠지.” 하면서도 나의 고백처럼, 그 해후의 인연처럼, 나의 내면의 어두운 세계를 사랑의 시로, 이루어 내지 못할 사랑의 고백으로, 일기처럼 연시를 쓰고 있었다. 서울에 수복을 하고 그걸 선문사(宣文社) 윤경섭 사장이 출판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를 지키질 않았다. 다방에서 우연히 이 이야길 최영해 씨에게 말했더니, 그 원고를 가져오라는 거다. 나는 그 무렵 지독히 고독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시집을 빨리 출판을 해서 정신의 환기를 하루빨리 하고 싶었다. 그 길로 나는 선문사 윤 사장에게로 가서 원고에 좀 손을 댈 곳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그 원고를 찾아왔다. 그리고 최영해씨에게 전달했다. 전달되고 곧 출판이 되었다. 그것이 나의 제5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1955.11.5.)󰡕였다.
쓸쓸한 11월, 깊은 가을, 깊은 저녁이었다. 책이 나왔다고 해서 컴컴해진 저녁 무렵 정음사 사장실로 들어섰다. 최영해씨는 한참 검인정교과서 교정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등불 아래서.
내가 들어서자, “우리 사무적인 건 사무적으로 합시다.” 하면서 돈을 내놓았다. 처음 듬뿍 받는 인세였다.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도 부산시절의 정음사에 출판을 했지만, 이렇지는 않았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사랑을 위한 아픈 시들이 이렇게 더러운 돈이 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못 받겠다 했더니 “우리 사무적인 건 사무적으로 하자고 하지 않았소.” 화가 들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게 무서워서 얼결에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갈 곳도 없고, 더욱 쓸쓸해져서 가까운 술집에 들러서 한잔 크게 쑥 들이켰다. 그리고 거리로 다시 나와서 그 무렵 가장 비싸고 유행이었던 필그림 넥타이를 세 개 샀다. 짙은 녹색으로, 하나는 최영해씨에게, 하나는 장만영씨에게, 그리고 하나는 쓸쓸한 나에게, 그리고 다시 정음사 사장실로 되돌아갔다. 사원 하나 없는 텅 빈 자기 방에서 그때까지 교정을 보고 있었다.
나는 넥타이와 돈을 다시 내놓았다. 하나는 당신에게 드리는 기념이라고, 그리고 돈은 내가 받을 수 없다고 그러자 “온 제기, 돈도 모르고 사랑만 했군, 자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하면서 그렇게 바쁘게 보고 있던 교정을 다 집어치우고 내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를 한 열 권 집어들곤 캄캄한 회현동 거리로 나섰다. 사장이지만 차도 없었다. 재동인가, 무교동인가, 그렇다. 무교동 어느 요정으로 들어섰다. 나로 선 생전 처음 들어서는 소위 일류 요리집이었다. 여자들이 반가이 떠들어대는 걸로 보아 최영해씨의 단골 같았다. 술상이 들어오고, 여자가 들어오고, 술이 돌았다. “이 사람이 이 시집을 낸 쓸쓸한 시인이오.” 하면서 가지고 갔던 시집을 풀어놓았다. 첫 시, 첫 귀절,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를 읽다가 술집 여인네들이 나도, 나도, 하면서 순식간에 모두 가져가고 말았다. 사랑이 가기 전에, 그 말에 홀려버린 거처럼,
며칠이 지났다. 도장을 찍으러 오라는 거다. 인지였다. 또 며칠이 지났다. 역시 인지였다. 또 며칠이 지났다. 이거 역시 인지였다. 이렇게 해서 3판이 수십 일간에 나가고 또 찍고 할 때, 출판기념회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최영해씨가 “그게 뭔데 그렇게 바람처럼 빨리 팔리는지, 조형 시집으로 벌어들인 돈 나도 좀 쓰겠소. 우리 국일관을 통털어 빌려서 출판기념회를 합시다. 장안의 문인·예술가들 다 초청해서. 내가 초청인이 되겠소.” 국일관은 종로3가, 파고다공원 건너편에 있었다. 1955년도 다 저물어가던 연말경이었던가. 매우 쌀쌀한 날씨였다. 마침 찾아갔던 ‘국일관’은 수리중이라 휴업이었다. 한국식으로 하자는 것이 이렇게 되니까 하는 수 없이 중국집으로 가장 컸던 ‘아서원(雅敍園)’으로 갔다. 날짜와 시간을 잡아서 정음사 사장 최영해씨 이름으로 초대장을 찍고 돌렸다.
그날 얼마나 많은 문인·예술가들이 모였던지, 참으로 황홀한 잔치였다. 경향신문사 한창우 사장 이름으로 생전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꽃이 들어오고, 대한럭비축구협회 이사들도 참석을 해주었으니. 한하운 시인은 자기 친구라고 나환자촌에 있는 시인 지망생들도 몇몇 몰고 왔다. 온 장안을 털어 잔치를 벌이고 있는 듯한 그 날의 광경, 여기 다 그려낼 수가 없다. 그땐 어머님도, 형님들도, 다 계셨는데,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던지, 인생의 슬픔도, 고독도, 희열도, 희망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던 거다.
이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는 실로 그 수를 헤아려낼 수 없이 팔렸다. 김동성(金東晟) 교수가 영역해서, 󰡔Before Love Fades Away󰡕 라는 이름으로 출판도 했다(나중에 Stopping by로 개명), 신흥영화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영화로도 되었다(주연 황해 김지미), 시집이 나갈수록 나의 부끄러움은 더해갔다. 이러다간 사랑의 시인이니, 뭐니, 실로 부끄러운 이름이라도 붙을까 하고,
1959년 7월, 나는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제28회 국제 PEN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최영해씨가 나를 불러냈다. “당신 여비가 없을 터이니” 하면서 그동안 한 푼도 손대지 않았던 인세를 다 내놓았다. 그땐 하는 수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다 받아버렸다. 시간도 가고, 생각도 좀 변해져서, 그러나 그 돈이 얼마나 많았던지 여비를 하고도 좀 남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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