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崔暎海씨와 그 주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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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회현동 꼭대기 윤동주 시인의 삼촌댁에서 ‘윤동주 시인 추모의 밤’이 있다고 해서 초대받은 일이 있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1948.1.30. 정음사, 윤동주 유고집, 초판, 정지용 서문, 유영 추도시, 강처중 발문)의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 밤 모인 사람 중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은, 최영해씨·박창해(朴昌海 : 국어학·전 연세대 교수)씨 정병욱(鄭炳昱 : 국문학·전 서울대 교수, 작고)씨·박영준(소설가·전 연세대 교수, 작고)씨·조풍연씨·장만영 시인, 말하자면 장만영씨와 나를 제외하곤 모두 연희전문학교 동창들이었다. 한 열 명. 윤영춘(尹永春: 윤동주 시인의 삼촌의 한 사람, 중국문학·전 경희대 교수) 시인은 가족의 한사람으로 참석했지만, 거의 윤동주 시인과 같은 연대에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며, 특히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보관했다가 출판이 되게까지 해낸 가장 가깝던 동기생이다.
나로선 이 윤동주시집을 출판한 최영해씨와 장만영씨를 제외하곤 모두 초면이었다. 물론 최영해씨도 연희전문학교 문과의 동년배 동창이었다.
동창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윤동주 시인은 평소에 그리 말이 없었고, 혼자 있길 좋아했고, 기숙사에 있었고, 혼자 그 부근을 (당시 신촌은 아주 시골이었고, 논·밭·숲, 이런 거로 둘러싸여 있었다) 소요하는 걸 좋아했고, P 발레리·R.M.릴케·F. 카프카, 이런 시인·작가들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했다. 이렇게 혼자 독서를 하고 있다가도 친구가 찾아들면, 아무리 바빠도 같이 시간을 보내주곤 했다는 거다. 그리 많이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다가 여자 문제가 나왔다. 여자 친구가 있었느냐고.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자, 정병욱 교수가 한마디 했다. 내게 누이동생이 있었다는 거, 윤동주가 자주 놀러 왔다는 거, 다른 친구네 집엔 거의 가지 않는 윤동주가 유독 자기 집에만 자주 온 것은 내 누이동생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말을 이어가면서 연희전문을 졸업할 때 자기 집에 와서 원고용지에 쓴 시작품집을 이거 졸업기념으로, 하고 주고 갔다는 거, 이건 말하자면 나를 통해서 내 누이동생에게 전달이 되었으면 한 심정이 있었을 거라는 거, 그 원고집이 이번 출판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거.
윤동주 시인은 정병욱씨와 작별한 후, 고향인 북간도로 갔다가, 일본 도쿄에 있는 릿쿄(立教) 대학 영문과로 갔다가 다시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학적을 옮겼다가 투옥되어 후쿠오카 (福岡) 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2월에 옥사를 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조국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그리고 친구가 보관하고 있던 원고로, 그것이 활자화되어 친구들 앞에 나타난 거다. 동창의 출판사 이름으로,
나는 이 모임의 자리에서 그의 작품 「자화상」을 읽었다. 그가 쓴 원고용지의 작품으로, 지명을 받아서, 그의 원고용지 글씨는 활자체와 같이 정확하고 정결했다. 한 자도 흘리게 쓴 것이 없었다. 또박또박 써내린 것이 인쇄물 같았다. 실로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정확하고, 정직하고, 꼼꼼하고, 건실하고, 침착하고, 고요하고, 그러한 성격이었을 거라고,
해방 후 나는 우리나라 말을 배울 겸 시집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 많은 시집이 나의 마음을 건드리고 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독 이 윤동주시집 만이 가슴에 와 닿았었다. 윤동주시집은 이 정음사의 것이 그 처음이었다. 한지, 4×6판, 72면, 이 작은 시집이 말하자면 윤동주 시인의 부활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나 많은 출판사들이 모양새를 바꾸어가며 상업적으로 출판을 계속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