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067호 (『떠난세월 떠난사람』)👁️ 조회수: 4,093 views

최영해崔暎海씨와 그 주변 1
————————————————————————-
김광주·박인환·이진섭·유호·이해랑·유두연·,·윤용하·한노단·이봉구·김수영·김영주·이순재·
이명은·조경희·이인범·조애실·조영암·박연희·김양수·김성민·장만영·이경성·권영숙·
방용구·최완복·이석곤·이병일·한창우·오종식·박계주·최호진·서임수·김내성·정한숙·임인규
————————————————————————-

최영해 사장, 본인은 이 사장이라는 말을 늘 쑥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문필가의 냄새가 짙은 지성인이며, 야인이며, 서민이며, 선비였다. 어느 말끝에 “최 사장.” 이렇게 부르면 “사장이 뭐야.” 이렇게 수줍게 넘기곤 했다. 그러다가 “최선생.” 이렇게 부르면 “내가 왜 당신의 선생이야.” 하곤 했다. 나의 기억으론 1914년생이니까 나보다 7세 연상이라, 형이라는 존칭을 붙일 수도 있었지만 최형, 이렇게 부르기엔 너무나 나에겐 큰 은인이었다. 그렇다고 최영해씨, 이렇게 부를 수는 더구나 없었다. 그래서 평소 나는 최선생, 최선생, 이렇게 비교적 무난한 존칭을 써왔지만, 이곳에 문장통일상 최영해씨, 이렇게 쓰기로 했다.
최영해씨 주변에 실로 많은 출판인들이 있었다. 출판계의 거물급 사장이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하지만 문인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예술계의 인사들, 교수들, 학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모여들게끔 하는 다정한 인간미와 폭넓은 아량을 지닌 인격자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의 문과시절엔 ‘삼사문학(三四文學 : 신백수·조풍연 등)’ 동인이기도 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실은 나도 시를 쓰려고 했는데 부친 때문에 이 길로 왔소.” 이렇게 나에게 던진 그 말을 지금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부친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이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서 투옥 생활을 하시다가 조국 해방과 더불어 풀려나신 한글학자이시다. 최영해씨의 효도에 관해선 나의 글이 그의 성실함을 다 따를 수가 없거니와 내가 직접 들은 이야기, 목격한 이야기를 여기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최영해씨는 그렇게 효자였다. 부자지간의 그 효성과 애정은 완전한 하나의 인도(人道), 바로 그것이었다. 시를 버리고 출판을 하게 된 큰 동기는 부친의 학문의 길을 직접적으로 돕고자 한 것이며, 감옥에 계신 아버님을 이어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현실적 인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효도와 생계, 그것을 위해서 최영해씨는 시의 길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버린 시를 그는 시인들의 시집을 출판하는 것으로 이어갔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시집을 많이 냈다. 정음사 하면 시집, 시집, 하면 정음사, 이렇게 말할 정도로 많은 시인들의 많은 시집들이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손으로 직접 교정이 보아지면서 출판이 되었던 기다.
여기 독자를 위해서 󰡔삼사문학󰡕 제2호에 실린 최영해씨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 시는 󰡔세월도 강산도(1974.5.17. 최영해 선생 화갑기념송사집)󰡕 속에 ‘변명하거니와 내지인內地人이란 일본인으로서 그렇게 안 하면 이 책은 총독부의 출판 허가를 못받음.’이라는 편집책임자 조풍연씨의 주석이 달려 있다.

구관조九官鳥

이 사나이는 고향을 잊은 영원의 방랑객이요
제애비는 불란서인, 제에미는 미국인米國人 ㅡ 한동안 내지인內地人의 연인도 가져 보았소.
“나의 동무야 나의 형제야”, 선각자인 이 청년의 얽매인 성대聲帶가 공기를 진동시켰소.
그러나 중국말을 들을 줄 아는 이웃을 못 가졌소.
옆집의 색시가 딴전을 보며,
“오하요 ㅡ”, 라 하오. (1934.9.19.)

일제 말기 이미 정음사는 서대문 밖 독립문 가까운 행촌동 자택에서 시작을 했으나 내가 처음으로 정음사에 출입을 할 때는 회현동에 있었다. 참으로 가족적인 분위기로 그 많은 출판물들이 출판되고 판매되고 영업이 되어갔었다. 해방 후 가장 왕성하고 대출판사로서의 위용을 갖춘 출판사였으나, 가보면 항상 조용한 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 사장실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층 한곳에 있는 최영해씨의 방이 응접실 겸 교정실이기도 했다. 사장 최영해씨가 직접 교정을 보고 있었으니까. 특히 검인정교과서는 자기 자신이 OK교정까지 완벽하게 교정을 보았다. 그 광경을 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목격을 하곤 했다. 교과서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러니까 정음사에서 나온 시집들은 하나 빠짐없이 최영해씨가 읽었던 거다. 그리고 최영해씨가 직접 청탁한 시집들이다. 그러니까 정음사 시집, 하면 그만큼의 무게를 이미 달고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최영해씨는 아드님 최동식(崔東植)군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 다방이고, 음식점이고, 이러한 것도 그분의 한 교육의 방침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힌다는 뜻도 있겠지만, 아버님 친구들하고도 일찍부터 안면을 갖게 하는, 그만큼 최영해씨는 매사 깊고 자유스러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빙’ 다방에서 최영해씨와 같이 처음 만난 그 아드님, 최동식군은 지금 아버님 대를 이어 가고 있는 정음사 사장이며,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화학과 교수(미국 버지니아 대학 이학박사)이다. 세월은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거다.
나는 최영해씨의 주변 사람으로 들어서면서부터 홍이섭(洪以燮: 국사학·연세대 교수)씨·정비석씨. 송지영씨·신석정 시인·한하운(韓何雲: 레프라시인)·김창집(金昌集: 초대 대한출판협회회장·民聲社 대표)씨·김희봉(金熙俸:명동 입구에 있는 문예서림文藝書林 주인)씨·정진숙(鄭鎭肅: 을유문화사 사장)씨·윤영(尹暎: 춘조사春潮社 사장)씨 등, 이러한 많은 장안의 명사들과 사귀게 되었다.
최영해씨는 많은 저명한 저자들을 포섭하면서도 선비적인 청탁(清濁)의 구별이 항상 선명하게 서 있는 분이었다. 이러한 것은 역시 시인적인 기질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늘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지저분한 사람은 늘 가까이하질 않았다.

Translate »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