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72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혜화동 11월👁️ 조회수: 4,458 views

혜화동 11월

한떼의 수녀들이
우수수 깔린 낙엽을 밟고 간다

우거진 늦가을 플라타너스
로터리

빨간 우체통

나는 이곳에서
세계 구석구석
이승에의 그리움을 띄운다.

詩想노트

나는 6ㆍ25동란 시절 임시수도 부산에서 수복한 후로는 줄곧 혜화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곳, 한번지(혜화동107), 한 전화번호, 한 침실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젠 집이 오래되어서 수도관도 녹슬고, 집 건물 곳곳이 노후가 되어서 집 기능이 나와 같이 늙어버렸습니다만 늘 고맙게 생각을 하면서 출입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이곳에서 다 성장시키고, 모두 혜화라는 이름이 붙는 학교를 졸업시켰으니까 혜화동이 그들의 고향이 되어버렸습니다.
혜화유치원, 혜화국민학교, 그리고 각자의 원대로 시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으로, 이렇게 성장을 했으니, 나같은 촌사람이(경기도 안성군 출신) 서울 사대문 안에서 내 생애를 다 보낸 게 됩니다.
참으로 고마운 집, 고마운 동네입니다. 혜화동 로터리엔 아름드리 굵은 플라타너스가 명물이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참으로 볼만한 우거진 단풍들이었고, 그 낙엽들이었습니다.
나는 이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많은 시를 썼었습니다. 그리고 그 낙엽들을 소재로 많은 시들을 썼었습니다.
이 플라타너스는 가을뿐만 아니라,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또 겨울대로 거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오래 굵은 거목으로 자라온 나무들이 도로 확장공사로 하나같이 베어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황막한 풍경들이지요. 이렇게 몰상식한 나라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모한 도시 행정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50년, 60년, 70년은 자라서 그렇게 굵은 나무로 성장을 해서 도시미관을 한층 높여주고 있는 나무들을 그렇게 하루 아침에 업자들로 하여 잘라버린다니 말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가 보십시오. 옛날 그대로 그 나무들이 우거지고 있지 않습니까. 파리뿐입니까. 외국 선진국에 가면 부러운 것이 그 나무들입니다.
정말 우리나라에선 나무를 아무렇게나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심었다간 뽑고, 베어 버리고, 심었다간 뽑고 베어버리고, 나무들도 안심하고 한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혜화동 로터리에 빨간 우체통이 있습니다. 매우 친절한 나의 애독자들이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우체통, 우체통을 통해서 그런대로 생긴 세계 각국의 시인들하고 나는 문통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단한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고 나의 작업실 앞길을 약 50m쯤 올라가면 수녀들이 기거하고 있는 기숙사가 있습니다. 혜화동에 가톨릭대학이 있고, 그 학교에 수녀들이 있습니다.
그 수녀들이 까만 옷을 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등교할 때 펭귄들이 몰려오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곤합니다.
그리고 혜화동 로터리엔 나의 단골인 서점이 있고, 문방구점이 있고, 화구들을 파는 화구상이 있고, 식당이 여러 곳 있고, 다방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년 내내 혜화동에서 빙빙 돌곤 합니다.
이제 늙어서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근 반세기를 살던 이곳의 정감이 저리게 가슴을 누르곤 합니다.
하기야 이 세상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만큼 고맙게 한 곳에, 한 집에, 한 주소에, 한 전화번호에 산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아직은 이곳 혜화동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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