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521호 운명에 대하여 끊임없이 응시하며👁️ 조회수: 5,162 views

이 편지가 그곳에 도달할 무렵이면, 원고 청탁을 다 썼으리라고 믿습니다. 치밀하고 꼼꼼한 당신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색이 깊어도 글이 잘 안 나오는 수가 많습니다만, 당신은 사색이 너무나 깊은 나머지 글 쓰는 일을 너무나 오래 망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늘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겁니다. 과도(過度)로 알고 싶어하는 곳에 왕왕 스스로 소외감을 느낄 때가 많은 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까, 하면서 과도로 잘 보아 주었으면, 과도로 인정 받았으면, 하는 우월감 같은 것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만큼 생각해 주지 않을 때(그렇게 생각을 할 때) 지독한 소외감을 느끼면서 더 나아가서는 열등감, 낙오감 같은 고독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일은 하지 않고 평가만 좋게 받으려는 무리한 심정, 좋은 작품을 못 쓰면서 과도한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기대, 이러한 심정은 모든 글 쓰는 사람에게 있는 소외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단적인 파벌이 이러한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자기 옹호, 자기 탐구, 자기 추적, 자기 발견이 글쓰는 사람에게는 특히 강하게 추적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항상 자기 자신을 응시(凝視)하고 있는 겁니다. 무섭게 응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양심에 대하여, 비밀에 대하여, 꿈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내일에 대하여, 통틀어서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끊임없이 응시하며, 추적하며, 사색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술가의 일생이옵니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단숨에 썼기 때문에 좀 무리가 있을 겁니다. 불충분한 곳도 있고. 널리 이해해 주실 것을 믿고 이만 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199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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