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허무는 변하지 않는 생자의 운명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 편질 씁니다. 그 동안 편운회관(片雲會館) 내부 장치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이모조모 생각하면서 마음이 놓이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작별하는 안심이겠지요. 내가 죽은 뒤에 누구에게 수모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어느 정도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떠나야지,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그곳에 집중적으로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당신도 요즘 귀여운 따님을 이태리로 유학 보내 놓고 쓸쓸하고 공허하고 마음 한구석 든든하면서 서운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면 새들처럼, 다들 곁에서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떠나야 합니다. 독립을 해야지요. 이것이 생물계(生物界)의 모든 현상이 아니겠어요.
언젠가 당신이 나의 그림 ‘까치 집’을 보고 크게 감동을 했듯이 부모(父母)들은 실로 언젠가는 까치의 빈집이 되는 겁니다. 이 공허(空虛)의 진리(眞理) 그것을 생자(生者)들은 철학을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공(空)의 세계지요.
이 공의 세계에는 내가 늘 나의 철학을 이야기 하고 있듯이 순수 고독(純粹孤獨)의 세계와 순수 허무(純粹虛無)의 세계가 다 들어 있는 순수 인생의 세계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이런 것이며, 이렇게 쓸쓸하면서 외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쓸쓸히, 그리고 외롭게 사는 것이 진실한 인생입니다. 들떠 사는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들떠 산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고 사는 겁니다. 이 세상에 변치 않는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인생 만사가 무상입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마음의 행복, 그것은 쓸쓸함과 외로움입니다. 고독과 허무는 변하지 않는 생자의 운명입니다.
좋은 딸에게, 좋은 힘이 될 수 있는 편질 자주 쓰십시오. 그럼 오늘 밤도 편안하길.
(1993. 4.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