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6일 (제34호)
시(詩)에 관한 단상(斷想)
양심은 가장 무서운
감시자이다.
-조병화-
주 점
일체의 수속이 싫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뚫고
드는
우울을 견디지 못해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나는 먼저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해 본다
필요 이상의 예절을 지켜야 할
아무런 죄도 나에겐 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지극히 우울해진다
한때 이 거리가
화려한 화단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기 싫은
그
날이 있고부터
이 거리의 회화會話를 나는 잊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러한 수속조차 이미 나에겐 권태스러워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눈 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산다는 것이 권태스러운 일이
아니라
수속을 해야 할 내가 있어
그 많은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어
눈 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아버지가 된 그 일이
마침내 어쩔 수 없는 내 여생과
같이.
이 시는 부산 피난 시절에 쓴 겁니다.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국정교과서 중학교 국어책에서 청탁을 받아서 ‘일기’라는 산문을 한
30~40매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원고료가 나왔다는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한국은행에서 지불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자주 들렀던 부산
광복동 금강다방에 술친구들을 모아 놓고 그 길로 원고료를 찾으려 한국은행 부산 사무소로 갔습니다. 찾아서 친구들과 즐겁게 한잔 하려고.
피난 간 한국은행은 지금의 부산시청 근방에 있었습니다. 그곳엘 찾아 갔더니 이곳이 아니라 대청동에 있는 국고금취급처로 가라고 하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또 그곳을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그곳을 찾아서 갔더니 점심을 먹으러 가서 아직 자리에 그 돈을 지불하는 담당자가 없다는 겁니다. 또
하는 수 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엔 관리들이나 공무원들이 제자리를 제 시간에 잘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 멋대로들
직장생활을 하고들 있었습니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담당이라는 작자는 술에 취해서 어슬렁 어슬렁 기어들어왔습니다. 나는 한 두 시간쯤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순간 나는 비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몇 푼 되지 않는 원고료를 타기 위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나는 그래도 참고 그 통지서를 그 친구에게 냈습니다. 보자마자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오시오.”하는
겁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여보,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구, 이러기요.”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쭉 내 모양을 보고
있었던 다른 은행원이 “그러지 말고 빨리 내드려라.”라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실로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찾아가지고 와서
금강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친구들하고 화풀이를 겸해서 흠뻑 썩은 조국을 마셔 버렸습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 시와 같이. 이 시는 그
사건을 소재로 해서 그 우울한 날을 기록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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