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303호 하루만의 위안👁️ 조회수: 6,504 views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흘러가는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이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정리해 주는 것.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
모든 것을 일단 종결시켜주는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의 해결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마음의 종교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에 대하여 태연히 정리하고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명 자체도 하나의 흘러가는
가변물(可變物)로 볼 수 있다면 죽음이 내일 닥쳐 온다해도
그리 마음의 동요는 없을 것이다. 인생은 모두 그게 그것―
흥분할 필요도 없고 희비애락 마음을 아프게 태울 필요도 없는 것.
그날이 오면, 우리들 모두 이 알뜰한 생명을 도로 두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 날이 오면,
모두 잊어버려야 마음 시원한 것. 마음 태우던 사람도,
애절히 사랑하던 사람도,
모두 먼 길가에서 그 언젠가 만나서 헤어지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철저한 보헤미안의 마음.
이러한 빈 마음처럼 이 세상을 작별하는데
필요한 것은 없다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체의 인간적인 애착을 버리고 다음 순간
이 세상을 떠나려는 준비를 하고 있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되면, 그날이 오면, 이 세상을 두고 어디로인지
우리들은 사라지긴 사라지는데 아무런 한마디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쓸쓸하고 허전한 노릇.
다만 한마디 이야기라도 이 세상에 남겼으면 하는 것은
사라져 가는 생명을 가진 모든 인간들의
무의식적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나의 마지막 말이여!
세상을 저주하지 말 것이며, 항상 허전한 고요함에 너는 있어라.

우리 시대가 그러하듯이
나는 항상 종말을 위하여 살아온다.

-『고백-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 오상, 1999, pp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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