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16호 먼 여행👁️ 조회수: 7,190 views

먼 여행

조병화

이제부턴 나를 찾거든
없다고만 해라

‘어딜 갔느냐’고 묻거든
‘그저 멀리 갔다’고만 해라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거든
‘그저 모른다’고만 해라

‘그저 멀리 갔다’고만 해라. (1991.11.4)

-제 38숙 『다는 갈 수 없는 세월』에서
모든 현존재는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곧 조병화시인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시간과의 승부에 있어서는/시간을 이겨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심판」)는 것이다. 단독자로 태어나 미지의 세계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고독한 숙명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각되기 마련이다. 시인에게도 이 일회적인 생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고독과 죽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세계관에는 허무주의자의 면모가 살펴진다. 실존을 넘어서서 죽음조차 여행의 한 경로로 이해하고 있는 시인의 태도는 위 인용 시에도 나타나 있다.
인간은 세월 속에 살다가는 존재, 짧은 생애를 견디고서 미지의 시간 속으로 떠나야 한다. 죽어서 도달하는 곳, 시인에게 그곳은 미지의 영역이다. 삶의 내력을 오롯이 할 수 없듯이 사후의 지향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 사후를 무(無)의 세계로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무신론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시편에는 종교에 기대어 고독이나 죽음의 문제를 초월하려는 시도가 살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죽음을 품고 죽음이 삶을 키운다는 무신론에 가까운 생의 인식이 시편의 도처에서 산견되는 것이다.

김명인, 조병화의 문학세계 II- 2011.9.24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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