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75호 황홀한 순간 (2010년 12월 14일)👁️ 조회수: 7,587 views

황홀한 순간

조병화

어느새, 직장에서 물러나
손자 손녀를 거느리는 제자들에 싸여
술 대접을 받으면
그들의 세월이 나의 세월
나의 세월이 그들의 세월,

잔을 주고 받으며, 받으며 주며
하다가, 술이 얼큰해지면
그들이 선생인지 내가 선생인지
선생인지 제자인지
서로 엉겨서 하나의 세월.

하면서, 술잔에 떠오르는 아득한
꿈과 방황의 시절,

그 시절이 오늘 이 밤에 같이 모여서
그들의 꿈과 나의 방황은 같이 익어
즐거운 술이 되어 행기로 피어 오른다

아, 이 인생, 황홀한 이 순간이여.

조병화,『아내의 방』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에는 쓸쓸하지요. 길바닥에 깔린 무수히 많은 낙엽들, 그것을 밟고 작업실에 나와서 난로를 켜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이 편지 올립니다.
오늘은 일요일이지요. 나는 월요일, 토요일이 없이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 이 작업실에서 줄곧 일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항상 무엇인가에 쪼들리면서. 이래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요 며칠은 옛날 서울고교 시절의 제자들이 불러내서 술 대접을 해 주곤 했습니다.
십이일에는 이재후 변호사의 단골 ‘두레’에서 신홍 서울시립대 전 총장, 김기인 전 관세청 청장과 같이, 십사일에는 신동호 스포츠조선 사장의 단골 ‘신원’에서 이종호 서부병원 부원장, 김달흠 사장, 김영필 전 은행장, 인하대 원정수 교수와 같이.
이렇게 불러 주니 엉터리로 선생 노릇을 하던 그 ‘내 인생 방황’ 시대가 부끄럽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조병화, 『조병화 서간집-외로우며 사랑하며』, 문학수첩, pp. 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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