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70호 혜화동惠化洞 로타리 (2010년 11월 9일)👁️ 조회수: 7,640 views

혜화동惠化洞 로타리

조병화

가을비 멎은 혜화동 로타리 저녁부근은
으스스 그림자 없는 슬픔

‘벨르레에느’의 슬픈 가을보다
내 가을이 더욱 슬프구나

사랑하던 사람도 슬퍼하던 사람도
가슴에 젖어지는 어젯날의 꽃송이

우수수 낙엽이 내리는
가는 정이 차구나

비야 내리다 머지고
마음은 줄줄이 고이는 저녁

아픈 사람아
두고 가는 정에 서 있는 가로등

홀로를 둘둘 말고 살아 있는
가을 저녁이

가을비 멎은 혜화동 로타리
으스스 그림자 없는 슬픔이 차다

조병화,『서울』 이 지구 자체를 일시적인 숙소라고 생각하는 시인이지만, 혜화동은 시인이 오래 거처하고 있는 집이 있는 곳이므로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합니다.
비에 멎은 뒤라서 그림자를 볼 수 없는 주위의 어두운 풍경이 더욱 슬픔을 자아내는 가을, 애증의 갈등을 주고받던 지난 날의 사람들을 회상하노라면, 떠난 사랑인 양 낙엽은 우수수 흩날리고, 그래서 더욱 인정이 그리워지는 시간. 비야 내리다가도 멎지만, 회상에 젖기 시작한 마음은 저녁이 되면 더욱 잦아들어, 이별한 애인을 못잊어 서 있는 듯한 저 가로등. 모든 것이 한 잎 낙엽처럼 홀로되어 듯한 착각에 빠져드는 이 가을의 정감으로, 그림자 하나 없는 거리에 싸늘한 슬픔만 깔리는 정경이,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추억의 문을 노크해 주는 그러한 서정시입니다.

조병화 시, 김대규 해설,『내일로 가는 길에』, 영언문화사, pp.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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