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29호 영하 십육도 (2010년 1월 19일)👁️ 조회수: 7,972 views

영하 십육도

영하 십육도 얼마라는 매서운 아침
냉수로 세수를 하면서 문득
어머님의 생각
어머님은 찬 겨울을 줄곧
이 냉수로 세술 하셨던 것이 아닌가

어머님이 혼자 되셔서
우리들이 서울 살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들은 참으로
매서운 이 겨울처럼 가난했었다

그걸 견디어냈던 것은
오로지 어머님의 하얀 모습, 아침마다
냉수로 세술 하시던 맑은 모습
냉랭한 그 모습이 아니었던가

일제 36년, 조선인처럼
우리 가족도 그렇게 가난했었지만
어머님은 매서운 그 가난을 이른 아침마다
매서운 냉수로 세술 하시듯이
맑게, 맑게, 우리를 끌어올리신 거다

실로 가난은 매서운 거
처량한 거

어머님, 그곳은 지금 따스하시옵니까
지금 이곳은 영하 십육 도 얼마라 합니다.

어머님은 참으로 부지런하셨습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시어,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이러하신 모습이 보기에 송구스러워 “좀 쉬어 가면서 하시지요?”하면 “쉬면 뭘 하니, 죽으면 썩을 살을”하시며 그저 혼자 부지런히 일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어머님의 철학, 나는 깊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나의 인생관으로 삼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부지런해라, 절약해라, 낭비하지 말라’ 이러한 말씀이나, 교훈 대신에 어머님이 하시는 그 근면하신 행동, 절약하시는 행동으로 나는 그 철학을 배워왔던 겁니다.
지금도 내 고향 난실리에 어머님을 위해서 세운 집인 편운재(片雲齋)의 흰 벽엔 ‘살은 죽으면 썩는다’라는 말씀이 돌로 새겨져 있습니다.

조병화,『그리다 만 초상화』, 지혜네, 1997, pp. 12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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