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192호 (『나 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조회수: 676 views

제9신 흔적이 없는 인생은 먼지 같은 것

요즘엔 틈만 나면 옛 서류 보따리를 찾아내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 시집 출판 기념회 사인장이니, 편지들이니, 사진들이니, 메모한 용지들이니, 하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버릴 것 버리고, 보관할 것 남기고, 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먼지로 손이 까매질 정도로.
서울에서 해방이 되자 결혼하고 살다가(혜화동 22, 전세 방), 인천으로 이사, 6ㆍ25 동란 때 부산 송도(松島)로 피난, 삼 년 동안 부산에서 피난 생활하고 1953년 서울로 수복, 지금 사는 혜화동 집으로 낙착을 하고 지금까지 근 사십 년 세월을 한 곳에서 보내 보니, 그 역사의 먼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소중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김환기(金煥基)씨의 그림이라든지, 박종화(朴鐘和) 선생하고 같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김광섭(金珖燮), 이헌구(李軒求), 안수길(安壽吉)씨 등의 필적이라든지, 최영해(崔暎海) 사장의 편지라든지, 지금 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학 제자들의 편지 등 나에겐 아주 중요한 물건 등이 쏟아져 나와서 편운회관(片雲會館)을 장식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쓰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이 그대로 한구석에 모여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헤메고, 집보다도 집 밖의 거리에서 여행을 살던 나에게 그런 것들이 이렇게 남아서 지나간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이어주다니, 참으로 고마운 세월들이었습니다.
실로 흔적 없는 인생은 먼지 같은 것, 바람이나 구름처럼 허무한 것, 공허한 것, 그러나 이런 것들이 그런대로 남아서 나의 어제를 말해 주고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 나의 세월입니까.
아, 기적처럼 남아 있는 나의 어제들, 그 무서운 동란 속에서도. (199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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