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대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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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김요섭·성춘복·김혜숙·이인학·이순신·장익룡·김완순·김경원·김양식·신동춘·유경환·홍윤숙·최원규·김명희·신영철·김정우·김영태·이병석·김후란·박정희·임성숙·황성이·강계순·최화국·김원중·허영자·박현령·김선경·박태진·이충이·오학영·박명용·임성조·서인숙·황금찬·이상인·김현숙·주영하·감태준·차한수·박의상·장석주·김정웅·전규태·양인자·이우재·노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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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인대회, 제4차 서울대회의 날짜를 1979년 7월 2일부터 6일까지로 잡아놓고, 슬슬 일을 시작했다.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잡아준 대로 대회본부를 남산에 있던 국제문화협회 내에 마련했다. 이미 국제문화협회에서 마련해놓은 장소에, 우리 사무진영, 김요섭·성춘복·김혜숙 시인들과 같이 가서 서로 일하기 좋게 환경을 만들고, 책상 배치니 사무실 간판이니 하는 것을 재조정해 놓고, 매일 그곳에서 만나 앞으로의 일들을 의논하기 시작을 했다.
물론 사무적인 것들은 국제문화협회의 직원들이 맡아서 해주었다. 총무부의 일은 누구 누구, 행사부의 일은 누구 누구, 섭외부의 일은 누구 누구, 홍보부의 일은 누구 누구, 이렇게 이미 배치를 해주어서 우리들 시인들은 행사만 잘 치르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대회에 필요한 경비나, 예산이나, 지출이나, 결산 같은 것은 사무적으로 국제문화협회 사람들이 그 실무를 다 담당하고, 우리 시인들은 표면에서 그 시인대회를 치르면 되게 된 거다.
이러한 관계로 국제문화협회 회장을 우리 시인대회의 명예회장으로 하고, 내가 실제적인 대회준비위원장 겸 대회장을 맡기로 했다. 여러 시인들의 중론에 의하여.
그러니까 총무부에서도 국제문화협회 사람들을 사무 담당의 역할을 만들어 맡기고, 행사부에서도, 섭외부에서도, 홍보부에서도, 그러한 담당의 일들을 만들어 시인들과 같이 일을 하게 했다.
한국시인협회의 회원들, 한국현대시인협회의 회원들,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회의 회원들, 약간 약간의 감정대립이 있는 시인들이 사무실로 찾아와서 뭐 끼리끼리 하기냐고 대드는 시인들도 있었지만, 뭐 그리 끼리끼리 하는 것도 없고 해서, 그렇게 따져드는 시인들에겐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떠맡기면서 소리없이 준비작업들을 해갔다.
그렇게 해가면서 나는 많은 시인들을 알게 되고, 많은 인간공부도 하게 되고, 많은 인생공부도 하게 되었다. 실로 여러 가지 인간들을 보게 되었던 거다.
뭐 그리 그것이, 그 자리가, 그 일이 대단하다고 누구든지 그 장(長)자리를 하고 싶어하는지, 그 분배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원만히 해가기 위해서 우리들 네 사람(김요섭 사무국장, 성춘복 사무차장, 김혜숙 사무국 총무)은 소리나지 않게 무리 없는 조직을 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성춘복 시인이 일일이 영수증을 청구하는 돈은 쓰기 싫다고, 큰 소리로 사무 집행에 있어서의 어려운 점을 토해냈다. 하긴 모든 예산이 정부에서 준 돈이고, 그것을 집행하려니까 영수증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택시를 타는 데도 영수증, 차나 커피를 마시는 데도 영수증이 있어야 하니, 그것을 어떻게 해낼 수가 없었다. 남산까지 찾아 올라오는 시인들에게 차나, 커피나, 점심이나, 혹은 저녁이면 식사·술대접도 해야 할 때도 있고, 사무실 분위기를 위해서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 필요해졌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준 돈에 회장 판공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게 그만한 용돈도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