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랑씨와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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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랑·성춘복·김광주·박동근·한노단·이인범·유치진·김진수·오영진·임긍재·박연희·
이진섭·윤용하·조영암·박인환·조좌호·조영식·방용구·백성희·황정순·오사랑·장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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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단씨는 문단 사람들보다는 이렇게 연극하는 사람들하고 더 가까이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교수였지만 그는 항상 연극무대와 살고 있었다.
단막극 「어머니」(신동아, 1934)를 발표함으로써 연극계에 데뷔, 일제 말기 제2회 전조선연극경연대회(1943.9.16.~12.26.)에 참가한 극단 성군(星群)의 공연작품 「신곡제新穀祭」(4막 5장, 김건金健 작)를 연출했고, 제3대회(1945.2~3)에 참가한 역시 성군의 공연작품 「달밤에 걷던 산 길」(3막 5장, 송영宋影 작)을 연출했다. 해방 후엔 「청혼소동」을 실험극장이(1965.4), 「교류」를 신협이(1966.5) 막을 올렸고, 여러 극단들이 그의 「전유화戰有花」를 공연하기도 한 본격적인 연극인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학강단을 계속 지키다가 한 15년 전에 작고를 했다.
부산에서의 일이었다. 부산에선 부산대학과 동아대학 두 곳을 전임 교수로 출강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국제시장 한복판에 고서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여러 권의 김기림(金起林) 시인의 서적들도 끼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노단씨는 우리 그룹에서 가장 술값이 든든한 보스였다. 거진 매일밤의 술값을 부담해주었다. 피난살이를 하던 우리들에겐 구세주 같은 존재로 국제시장에 군림하고 있었던 거다. 김광주씨 이해랑 씨를 비롯해서 임긍재·박연희·이진섭·윤용하·조영암·이인범, 때로 박인환, 그리고 부산대학의 조좌호 교수(역사학, 전 성균관대학 총장)를 비롯해서 여러 교수들이 저녁이면 국제시장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비가 내리던 어느날 저녁 무렵, 술을 마시다가 “나 좀 학교에 갔다. 올께.”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한노단 교수, “어딜 가오, 이 시간에?” 좌석의 얼굴들, “강의 한 시간이 남아 있어서.” “이 시간에 무슨 강의를.” “학생이 없으면 그냥 올께.” 이런 문답이 오고 가다가 빗소리 나는 밖으로 그는 사라졌다.
학생이 없으면 그냥 온다던 그는 한 두어 시간쯤 될 무렵에서야 담배를 물고 술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서면서 하는 말이 가보니 여학생 하나가 맨 앞자리 책상에 앉아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
오늘은 비도 오고 늦고 어두우니 휴강하자, 이렇게 말하자 「쬐껨만 합시데이, 예.」라고 하더라는 거, 하는 수 없이 속으론 괘씸하였지만 강의를 하고 오는 길이라는 거였다. 얼마나 재미있던 강의실 풍경이었던 가, 상상을 하면서 우리들은 취해들어갔다. “쬐껨만 더 합시데이, 예.”를 연발하면서 술잔을 수없이 돌리곤 했다. 그 후 우리는 서로 만나면 “쬐껨만 하러 갑시데이, 예.”라는 말로 시작을 해서 “자, 그럼 이걸로 오늘은 강의를 끝냅시다.”로 밤을 끝내고 술집을 나서곤 했다.
서울로 올라오고 싶다는 편지와 이력서 두 통이 나에게로 왔다. 그 때 나는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인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같이 대학에 있고 싶어서 그 이력서 한 통을 조영식 총장에게 전했다. “우리 대학을 위해서 아주 도움이 될 분입니다.”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면서.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머지 한 통을 야간대학인 국제대학 방용구(龐溶九) 학장에게 전했다. 방용구 학장도 영어영문학이 전공이어서(경성제국대학 출신) 금세 그 실력을 알고 “좋습니다.” 했다. 그때 부산대학교에선 한노단씨는 문리대 학장으 로 있었다. 방용구 학장은 나와는 술로 친교가 짙게 맺어진 사이, 내가 존경하고 있던 분, 말하자면 명동대학 대선배격이었다. 실로 명동 대학촌은 우리나라 각계 각 인사들이 출몰하던 술집거리여서 이러한 각계 각 인사들이 서로 손쉽게 서로 알게 되고 친하게 되던 인생 대학촌이었던 거다. 그러니까 손쉽게 한노단씨는 국제대학 전임교수로 오게 되었다. 그러자 뒤늦게 경희대학교에서 전임으로 하겠다는 통지가 나에게 전해왔다.
저녁 무렵 국제대학(서대문네거리 부근) 근처에 있던 고향이라는 술집에서 한잔 나누면서 의논을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날 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야간이고, 하나는 주간이니까, 별 상관이 없을 터이니 둘 다 전임을 하지, 이렇게.
그리고 근 일년을 아무 탈없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었다. 인컴도 그만큼 있고 해서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