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064호 (『떠난세월 떠난사람』)👁️ 조회수: 3,846 views

조지훈趙芝薰씨와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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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왕학수·정한숙·황산덕·한태연·정비석·한창우·이관구·민재정·오종식·김광주·유호·
안의섭·박기원·김진찬·이한직·조영암·이하윤·이헌구·이명온·조경희·조애실·양주동·김광섭·
김환기·박연희·한노단·이봉구·이해랑·윤용하·이진섭·박인환·이인범·전봉초·김광수·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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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연·박계주·모윤숙·김동리·조연현·곽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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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자유문학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세아재단이 한국 문인들을 위해서 마련한 대금의 문학상이었다. 그 당시엔 가장 권위있는 빛나는 문학상이었다. 지금은 그 상이 없어졌기 때문에 참고로 그 수장자들을 열거해보기로 한다.
제1회(1953년도) 박영준(朴榮濬, 소설), 제2회(1954년도) 황순원(黃順元, 소설), 김동명(金東鳴, 시), 신동집(申瞳集, 시), 제3회 (1955년도) 염상섭(廉想涉, 소설), 김동리(金東里, 소설), 서정주(徐廷柱, 시), 박목월(朴木月, 시), 제4회(1956년도) 임옥인(林玉仁, 소설), 김이석(金利錫, 소설), 조지훈(趙芝薰, 시), 김용호(金容浩, 시), 박두진(朴斗鎭, 시), 제5회(1957년도) 김성한(金聲翰, 소설), 한무숙(韓戊淑, 소설), 유치환(柳致環, 시), 박남수(朴南秀, 시), 제6회(1958년도) 유주현(柳周鉉, 소설), 오영진(吳泳鎭, 희곡·시나리오), 마해송(馬海松, 아동문학), 제7회(1959년도) 오영수(吳永壽, 소설), 김춘수(金春洙, 시), 그리고 나였다. 나와 오영수와 김춘수, 세 사람이 탄 7회 때의 상금은 미화 3000불이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3000불의 삼분의 일씩인 1000불에 해당되는 한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엔 대금이었다.
이렇게 이 상은 한 사람, 혹은 세 사람, 혹은 네 사람, 심지어는 다섯 사람까지 동시에 받고 있었다. 이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가. 그만큼 이 상을 타려고 하는 경쟁자들이 많았던 것을 말하고 있는 거다. 그 경쟁! 지금도 그렇지만 상을 놓고 얼마나 치열한 경쟁이 있는 건가. 작품, 그 실력만으로 상이 수상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잘되지 않기 때문에 후문이 두려울 때가 있는 거다. 심지어는 심사원이 자기 표를 넣었다는 후문도 있을 정도로, 하도 시끄러워져서 아세아재단은 제7회로 이 빛나던 문학상 제도를 걷어버렸다.
참으로 챙피한 노릇이었고 우리들 문인들을 위해서 애석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1959년이 다 저물어들던 12월 어두컴컴한 종로길, 광화문우체국 옆을 슬슬 한잔 술에 취해서 다시 한잔하려고 술친구를 찾아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병화, 너 됐어.”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박연희(朴淵禧, 소설가) 씨였다. 박연희씨는 그때 동아일보 문화부에 문학담당 기자로 있었다. 지금은 예술원 회원이지만,
“무어가 됐단 말이오?” 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서 있었다. 너무나 큰소리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길 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고 지나갔다. “너 자유문학상을 타게 됐어.” 이렇게 얼결에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 자유문학상을 타게 됐어’라는 뜻이었다. 지금 방금 소식이 들어와 기사를 써 놓고 나왔다는 거다. 기뻤다. 내가 타다니. 그 길로 우린 명동 단골 술집으로 직행을 했다. 거기엔 이미 조지훈 시인이 와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이번엔 대부라 하지 않고 “병화, 넌 아예 상 같은 거 탈 생각 하지 말어. 넌 돈에 궁색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말을 던지면서 좌석을 만들어주는 거다. “돈, 돈 같은 거 다 가져가고 상장만 주어도 좋겠소.” 나도 말을 던지면서 박연희씨와 같이 자릴 잡았다. 실은 조지훈 시인은 그때 이 자유문학상의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고, 나에게 그 수상자 결정을 먼저 알리려고 이 술집에 와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적극 수상자로 나를 민 것이 분명했 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는 그렇게 정직하고, 강직하고, 고집이 세고, 정의로운 성품의 시인이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상을 주어야 한다는 동정적인 표가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니까 상을 줄 필요가 없고, 빈곤하기 때문에 상을 주어야 한다는 식의 수상자 결정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러한 상의 결정은 그제나 이제나 그릇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상은 상이다. 그 작품이다. 그 작품의 우수성이다. 그렇지 않은가.
1959년, 나는 성문각에서 제8시집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시집을 냈다. 그해 7월에 독일 프랑크푸르트(괴테의 고향)에서 열렸던 국제 PEN대회(주요섭·김성한·조경희·전숙희·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주요섭(소설가, 당시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씨와 동행을 해서 런던·파리·비엔나·쥬네브·로마·플로렌스·아테네·카이로·카라치·방콕 마닐라·홍콩, 이렇게 돌며, 참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길엔 홍콩·베이루트·이스탄불에 들렀었다.
돌아와서 그 그림과 시를 조선일보에 연재를 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송지영(宋志英)선생. 근 한달에 걸쳐 15회인가 16회인가 연재를 마칠 무렵 성문각에서 출판을 하자고 했다. 좀 분량이 적은 거 같아서 뒤에 「밤의 이야기」 연시 5편을 넣어서 시집을 냈다. 이 시집에 넣은 연시 「밤의 이야기」 5편이 아세아자유문학상의 수상작품이 되었다는 거다.
사실 그렇다. 상은 돈이 아니라 하나의 명예로운 인정이 아닌가. 상장 그것이 소중한 것이며 자기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위안인 것이다. 그날 밤 어떻게나 서로 술을 마셨는지 장안이 모두 우리들의 세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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