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83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편운재기片雲齋記👁️ 조회수: 4,180 views

편운재기片雲齋記

보이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눈이 오가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사람의 목소리 들리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작별이 바쁜 이 무상無常부근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이 세상에선 평생토록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하늘 한 자리 한 생각 묻어
있을 수 있는 동안, 그냥
떠 있으려 했어요

차례가 있는 자리, 차례 속에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차례, 가벼이
떠나려 했어요.

번창의 폐허
이 이웃 부근, 버려진
영혼의 의자

시간에
앉아

보이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눈이 오가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사람의 목소리 들리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詩想노트

나는 학창시절부터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집을 짓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 그 역사 속에 집을 짓는다는, 그 생각이며, 그 꿈이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집,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 항상 그 시간 속에 존재하는 집, 문화사의 사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집, 그러한 집을 짓고, 그 속에 살려고 꿈을 꾸었었습니다.
지금 나의 나이 70을 넘고 보니 과연 이러한 학창시절의 꿈이 이루어져가고 있는지 가끔 반성해 보곤 합니다.
실로 역사상의 인물들이야말로 지금 그 역사 속에, 그 시간 속에 드높은 봉우리 위에 우리들이 우러러보는 좋은 집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라지지 않는, 무너지지 않는, 화재나 지변이 있어도 소실될 염려도 없는 영원장구할 집을 짓고 계시지 않습니까.
언젠가 그 옛날 위와 같은 시를 썼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지상의 집이라는 것은 불이 나서 없어질 수도 있고, 사변이 나서 없어질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의 세월로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그러한 소유에 대한 근심으로 정신 생활을 항상 평온하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이러한 근심,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 집 같은 거 갖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그리고 죽으면 다 버리고 떠나가야 할 것을, 하는 생각이 늘 들어서 사실 남의 집 빌려 살다가 이 세상 떠나려 했던 겁니다.
이 시처럼,
그러나 1962년 6월 2일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시골에 모시고 내려 갔었습니다. 뒷동산 선산 양지바른 곳에 모셨습니다.
다음 해, 그러니까 1963년 한식날 성묘로 고향에 내려 갔었습니다. 그 때 문득 어머님의 제사를 모시는 묘막(墓幕)을 하나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님 산소에서 가까운 솔밭에 삽을 질렀습니다.
그리하여 돈이 생기는 대로 하나 하나 벽을 올려 갔었습니다. 작은 형님이 모든 일을 맡아서 해 주셨습니다.
여름 방학을 꼬박 형님하고 같이 이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 점이 지나가길래, ‘인생도 저렇게 뜬 흰 조각구름같이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편운재片雲齋라는 옥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학생시절의 꿈이었던 내 철학과 모순이 되는 것을 상기하면서 위와 같은 시를 썼던 겁니다.
이렇게 어머님의 묘막을 지어 놓고 해마다 나는 어머님의 기제사를 이곳 편운재에서 지내곤 합니다. 모기에 뜯기면서도.
실로 나의 철학은 편운片雲입니다. 떠가는 하얀 쪼각구름입니다. 푸른 하늘(존재의 세계)에 떠가는 약한 조각구름(먼지)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집을 가지면 무엇을 하고, 좋은 물건을 가지면 무엇을 하고, 토지나 건물을 가지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오로지 자기의 꿈 하나, 꿈을 이루워 놓은 역사상의 집, 그 명예 하나만 있으면 만족이지.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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