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사월의 시
저녁 노을
퇴근길의 이 한 잔
사월에 접어들어
아무리 마셔도 밤은 멀다
술집은 어디나 대만원
돈 있는 사람이나
돈 없는 사람이나
인색한 사람이나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나
빈천한 사람이나
빈천하지 않은 사람이나
뻣내는 사람이나
뻣내지 않는 사람이나
도도한 사람이나
도도하지 않은 사람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이나
권세가 없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술집은 도도히 흐르는
자유의 장場
지구는 세계 어디서나 술집에서 하나가 된다
거리의 버들도 이제 푸르게 늘어져
이 너그러운 저녁 노을
아무리 마셔도 밤은 멀다
풀어 버리는 거다, 한없이
내던지는 거다, 한없이
잊어버리는 거다, 한없이
텅 비어 버리는 거다, 한없이
벗이여! 그래도 쓸쓸한가!
퇴근길, 이 한 잔
또 내일이 되는 게 아닌가.
-일본경제신문(원문 일어)
시집 『머나먼 약속(約束)』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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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제 26시집 『머나먼 약속(約束)』(1983.10.4. 현대문학사)에 실려 있는 작품입니다.
이 무렵, 나는 일본경제신문 문화부의 청탁을 받고, 1983년 4월에 4편의 일본어 시를 발표했던 겁니다. 일본경제신문에서는 일요일판에 시 한 편씩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 4월분의 일요시를 내가 맡게 되었던 겁니다.
4월 3일에 「안개」, 10일에 「점사(占師)」, 17일에 「도쓰카의 꽃」, 24일에 「저녁노을」.
오래간만에 쓴 일본시였지만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일본 독자들에게서 편지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점사(占師)」라는 시는 중국인이 중국어로 번역을 해서 보내왔었습니다.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외국시를 써서 외국에서 원고료라는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시는 그 하나 「저녁노을」을 다시 한국말로 옮긴 것입니다. 옮기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시중 내가 나의 모국어로 옮기는 것도 참으로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뜻은 전달이 되나 시가 풍기는 그 향기라든지 뉘앙스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시를 번역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시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나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잘못 번역되어 나가면 그렇게 잘못 인상이 찍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시가 번역이 되면 즐겁기만 했지만, 지금은 시가 번역되어 나가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시는 의미 전달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전달하면서 풍기는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할까, 그 분위기라고 할까, 보다 더 시적 직감으로 전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한 총체적인 뉘앙스가 살아서 움직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 한국 정부에서는 일본 언론인, 문화인, 지식인 들을 많이 초대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