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의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646호 일흔세번째 서신👁️ 조회수: 4,922 views

요즘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처럼 혼자의 날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세월에서 벗어나는 모양이지요. 이젠 점점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으로 되어 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온종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고
서신 왕래 하나 없는 날에는
내가 이승에 있는지 저승에 있는지
혹은 먼 먼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절애고도(絶崖孤島), 그곳에 유배당해 왔는지

유배당해 왔다면
어머님, 저는 무슨 업(業)으로 이곳에 와 있을까요

어제도 어제의 어제도 또 그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홀로 나의 업을 생각하면서
먼 훗날 어머님께 올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머님,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이승입니까, 저승입니까,
아니면 유배를 당해 와 있는 섬입니까.

매일이 매일
이렇게 텅 빈 우주이옵니다.

「매일이 매일」

요즘 나는 아내의 기울어 가는 병세를 보며 ‘운명’이라는 것을 줄곧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운명이라고.
운명은 업으로 이루어지며, ‘업(業)은 그 운명의 핵(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는 이 생명의 윤회, 그 업을 벗어나려 해서도 안 되겠지요.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체념을 가지고 살아가니 오히려 위안이 되곤 합니다. 변하는 것은 변하는 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섣부른 철학일까요.
내내 안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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