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갑자기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 편지 올립니다. 오늘 아침 매일 하듯이 혜화동 로터리 주유소를 돌아, 내 작업실 입구에 들어서니 귀뚜라미가 울어 대고 있었습니다.
벌써 가을로 접어들었나 하는 생각에 새삼 세월의 빠름에 놀랐습니다.
그 동안 무고들 하셨습니까. 아직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기 때문에 항상 궁금해집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나, 남해 앞바다 대형 유조선 좌초 사건이나, 태풍 피해 소동이나, 하루도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에 휘말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 나라 국민들은 숙명적으로 고생을 다른 나라 국민들보다 더 많이 하게끔 태어난 것 같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내가 살아가는 데 불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짧은 시 하나 보내 드립니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인사 없이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슬퍼하지 마오
그저 쓰던 물건 하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오
참으로 긴 세월을 어설프게
필수품이 될 수 없는 쓸모없는 물건으로 끼어 살면서도
이리저리 고맙게 살았소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이 세상 인사 없이 떠나더라도
슬퍼 마오
어머님 곁으로 가니. (1995. 8. 1.)
좀 슬퍼 보이는 시 같지만, 꼭 당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 나의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작별의 마음을 가지고, 죽음에 늘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 또. (1995. 8.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