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315호 밤의 이야기-죽음으로👁️ 조회수: 6,397 views

죽음으로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것을 살아 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 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詩想노트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술집에 들렀었습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하는 물음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생각이 시가 될 것 같은 생각이어서, 그 술자리에서 이 시를 완성했습니다.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다 너나할 것 없이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같이 확실한 인생 행선지가 어디 있습니까.
어머님이 주신 목숨만큼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그 어머님이 주신 목숨을 노자 삼아서 그 노자만큼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학교에 학생으로 다닐 때부터 인간은 죽는 것이다. 그럼 죽을 때까지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명제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 왔던 겁니다.
나를 더 긴장시키며, 시간을 아끼는 생활을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 죽음의 철학을 철저히 살아 왔던 겁니다.
때문에 너무나 시간생활에 엄했던 겁니다. 사람하고 약속을 한다든지, 약속한 시간을 지킨다든지, 나의 일에 있어서 시간을 잘 쓴다든지, 낭비 없이 잘 쓴다든지, 헛되는 시간이 하나 없이 그 시간들을 쓰면서 살아 왔던 겁니다.
이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실로 시간을 직선으로 살아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을 돌고 돌고 살아 온 것이 아니라, 직선으로 직선으로 살아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시에서는 그 직선개념을 쓴 겁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시가 나에겐 참으로 많습니다만, 그것은 죽음이라는 한계점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살라는 내가 나에게 주는 충고라고 할까, 자각이라고 할까, 하는 뜻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죽음을 예찬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그대로 죽음을 긍정함으로써 나오는 존재의 한 인식이라고 할까, 한정된 생명, 그 인생을 늘 생각하고 있는 곳에서 이러한 시들이 나오곤 했습니다.
실로 우리들은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시의 오솔길을 가며』, 스포츠서울, 1992, pp 18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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