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301호 소라👁️ 조회수: 6,827 views

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 전시개막: 2013.5.4(토) 12시
□ 전시기간: 2013.5.4(토)~2013.5.31(금)
□ 장소 :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337)
이 시는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기분과 생활을 대표하는 시라 하겠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여 이 소박한 작은 시를
나 스스로 아끼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시는 어느 무덥던 여름날 오후
김준 여사와 여의전 동창인 김태순 여사의 연구실인
서울의과대학 생리학 교실에서 김태순 여사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무료한 시간에 김태순 여사의 부채에
이럭저럭 낙서를 한 말하자면 하나의 낙서였다.
해방 직후의 대학 구내의 한산한 살풍경―무더운 여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
그것도 어느 부탁 일로. 이러한 장소에 놓여 있는 나 스스로의 모습.
역사는 돌고 막연한 여정. 이렇게 되어 내 스스로의 자화상이
부채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인천 앞 월미도 바닷가를 돌아다니면
작은 소라 새끼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것들을 사람이 만지면 죽은 듯이 나동그라진다.
그러다가 잠시 동안 가만히 있을라치면
또다시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라 새끼는 소라 새끼대로 생명이 있으며
생존할 줄 알며 생활할 줄 알며
무엇인지도 모르게 혼자서 꾸물꾸물
스스로의 운명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운명에 살고 있는 것같이 보이곤 하였다.
마침내 내가 그 소라 새끼와 같이 바다 기슭에,
월미도 기슭에, 인천 기슭에, 지구 기슭에, 운명 기슭에,
생명 기슭에 꾸물꾸물 스스로의 갑라 속에 갇혀
홀로 외롭게 살고 있는 것같이 느껴 오기만 했다.
희망과 절망 기슭에 생존과 허망 기슭에.
이 작품 는 내 스스로의 자화상이요
내 시의 출발의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고백-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 오상, 1999, pp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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