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299호 옛 엽서👁️ 조회수: 6,717 views

옛 엽서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연락선이 왔다 간다는 항구로
남행 열차는 쉴새 없이 달렸습니다
삼등실 좁은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흐르고
수족관에 뜬 어린 詩같이
싹 튼 보리밭이 보이고
포플라가 보이고 늙은 산맥이 보였습니다
말소리도 잠들어 버린 차간에
나는
중앙 아시아 어느 바다로 가는 것일 게니 하고
졸음 없는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 전시개막: 2013.5.4(토) 12시
□ 전시기간: 2013.5.4(토)~2013.5.31(금)
□ 장소 :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337)

이 시도 어느 서신의 한 토막이다.
일본으로 유학하던 시절
경부선 봄비 내리는 풍경을 그려 본 것이었다.
연락선이 오고 가는 항구로 내려 달리는 삼등실 여객실에서
젖어 흐르는 여심과 우리나라의 늙은 자연 속에
생명처럼 파릇파릇이 솟아오르는 봄 보리밭의 인상.
어쩌면 어린 시심의 이른 봄 같은 소박한 서정인지도 모른다.
워낙에 나의 태생은 이런 소박한 경기도 산골 시골이니까.
나는 기차를 타면 꼭 낮차를 탄다. 밤차를 타는 것은 거의 없다.
연이어 비치는 풍경이 아까워서다.
기차를 타면 책을 읽는 일이 없다.
이것도 연이어 비쳐 흐르는 자연 풍경이
마냥 아깝기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이동하는 좌석 한 구석에서 마음 속에 머리 속에
온 지구 각 지방 지도를 펴놓고
내 마음대로 상상의 여행을 하는 어린 버릇이 있다.
말하자면 같은 경부선을 달리면서도 나는
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어느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달릴 때도 있고,
혹은 이태리 반도를 달릴 때도 있는 것이다.
차장에 영사되어 가는 자연 풍경 인생 풍경을
그곳도 그렇거니 하고 생각을 하여 이중의 심안으로
자연과 인생과 나의 위치를 생각하며 내다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같은 열차, 같은 연선, 같은 지방,
같은 인생을 여행하면서도 여러 가지 각도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읽으면 독자들은 아마도 웃어버리겠지만
여행을 즐기는 독자들은 한번 해보시길 권한다.
항상 타는 경부선을 타고도
엉뚱한 미지의 이국을 여행하는 심경을 얻을 것이다.
인생은 다 그게 그것이요 생각하고 상상하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아마 이 시의 시절엔 경부선을 타고
엉뚱한 중앙아시아 어느 지역을 상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생은 이러한 엉뚱한 상상 속에서 자기도 예기치 못한
엉뚱한 미지의 즐거움을 얻는 수도 있는 법이다.
‘여행은 나의 교실(?)’ 이렇게 쓴 김기림의 시 한 토막이 생각난다.
또 S.스펜서의 시 한 구절도 생각난다.

인생은 태양에서 태어나 태양으로 돌아가는 짤막한 여행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은
이 짤막한 여행 동안에 ㅡ명예라는 작은 먼지를 하나
자기가 살았던 자리에 남기고 간다.

하는 뜻의 시다.
인생은 여정-미지의 내일에 연결하는 짤막한 여정.
아 나의 동행인들이여!

『고백-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 오상, 1999, pp 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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