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182호 시는 뜨거운 떨림 (2011년 2월 1일)👁️ 조회수: 7,639 views

시는 뜨거운 떨림― Dr W. S. Roske-cho에게

조병화

생판 모르는 당신에게서 날아든
이 편지를 읽으며
왜, 나는 이렇게 눈물이 흘러 나오나요

먼 그곳, 독일 어느 도시에서
뜻밖에도 날아든 이 편지
어찌 그 먼 곳까지
내 시가 날아갔던가

옛 시집 《낮은 목소리》 속에 숨어 있던
시 한 구절 ‘잊게 하옵소서’가
당신 눈에 띄어
그렇게도 큰 떨림으로
당신 뜨거운 가슴에 깊이
자리잡았단 말인가

실로 시는 말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영혼의 떨림,
그 영혼의 흔들림이던가

시는 무한공간을 정처 없이 보이지 않게
날아다니다가 떠돌아다니다가
빈 아린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한동안 빈 아린 가슴과 동거하며
화끈화끈 떨게 하곤
다시 떠나는 영혼의 입김

아, 이 아침
생판 모르는 먼 사람에게서 날아온
편지를 읽으며
나의 눈물은 말이 없습니다

뜨겁게.

(1997. 2. 7)

조병화,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면 음력 설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봄도 이제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먼 독일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한없이 한없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눈물이 나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Dr W. S. Roske-cho (趙華鮮), 독일 문학을 전공하시는 분이라 합니다.
나의 열 번째 시집 『낮은 목소리(1962, 중앙문화사)』에 크게 감동을 해서 그것을 독일에서 번역 출판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집 속에서도 라는 시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나는 손을 댈 수도 없는, 입술도 댈 수도 없는 어느 순결한 아름다운 기독교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어머님도 작고해서 어머님의 불교 세계와 애인의 기독교 세계를 합쳐서 이 세상의 허무와 실제, 그 먼 부재를 생각했던 겁니다.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임시로 존재하는 가숙(假宿)의 자리요, 부재(不在)의 자리라는 생각으로 ‘어머니‘라는 본향(本鄕), 그 영원한 원숙(原宿)을 찾아가는 슬픈, 외로운 나그네의 철학을 시로써 펴냈던 겁니다.
어머님의 작고하신 나이 여든한 살을 추억하기 위해서 사행시, 여든한 편을 써서 실향민 영문학자 원응서씨가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낮은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출판했던 겁니다.
(…중략..)
실로 시는 인간에게 주어진 목소리 가운데서 가장 낮은 목소리옵니다. 그 참된 가장 낮은 목소리지요. 가짜들이 소리가 높은 것입니다.

조병화, 『외로우며 사랑하며』, 가야미디어, pp. 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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