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신 인생무상, 그 충만한 허무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대단히 분주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소식이 항상 캄캄하고, 캄캄할수록 궁금해집니다. 잠시도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편지라도 내 마음을 대신해 주었으면 합니다.
지난 6월 20일엔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학생 약 백 명이 편운재로 문학 기행을 왔습니다. 두 달마다 그들은 문인(文人)들의 고향, 그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현지 교육 실습한다고 했습니다. 아주 조직적으로 발표도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어머님 묘소를 위시해서 작은 조각들로 꾸며진 어머님 동산을 안내하고, 편운회관(片雲會館)에서 나의 인생과 문학 이야길 해주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동안 내가 닦아 온 문학의 길이 이곳에 훤히 보여 있어서 그런 대로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온 것 같은 감회가 들었습니다.
일전에 당신이 이야기한 J스님의 고행길과 나의 문학의 고행길을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 정신적(영혼적) 고행을 하는 것은 길[도(道)]을 가는 존재(存在)로서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문학(文學)으로 고행을 해온 것이고 J스님은 철학(哲學, 구도求道의 길)으로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이고, 궁극에 있어서는 다 인생 무상(人生無常), 그 충만한 허무로서 죽음을, 그 이별을, 극복(克服)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자(生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학은 ‘죽음’이니까요. 죽음을 아는 사람이 도통을 한 사람입니다. 그 죽음을 따뜻한 무욕(無欲), 무상(無常), 무사(無邪), 무아(無我)로 받아들여야 하지요.
녹음이 짙어 가는 계절, 항상 마음 편안하시길.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 보냅니다. (1993.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