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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병화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322호 가을날-릴케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13-11-06 14:11
조회수: 3089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눕히고
  광야로 바람을 보내 주시옵소서.

  일 년의 마지막 열매들이 더욱 더
  익도록 따뜻한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베풀어 주시옵소서.
  과일은 익을 대로 익어
  마지막 단맛이 향긋한 포도주에
  깃들 것이옵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을 짓지 않을 것이옵니다.
  지금 고독한 자는
  앞으로도 영원히 고독한 대로 살며
  밤을 자지 않고
  긴 편지를 쓸 것이옵니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 불안스러이
  가로수가 나란히 서 있는 길을
  이리저리 휘날릴 것이옵니다.





  이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독일 시인의 「가을날」이라는 시이다. 역시 일본어 번역 시집에서 우리말로 중역해 본 것이지만 릴케의 가을 맛을 전하는 내용 면에선 과히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릴케는 내성적이며,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며, 신앙적인 시인이다.
  자기 내부 세계에서 일생을 가장 독일 시인답게 살다가 마지막에도 시인답게 장미 가시에 찔려 그것이 화농(化膿)이 되어 죽었다는 에피소드를 남긴 시인이다.
  이 릴케에 비하면, 폴 베를렌은 실로 서정적이며 생활적이며 도시적이며 인생적인 시인이다.
  폴 베를렌이 일생을 인생적인 애수에 젖어서 살았다면 릴케는 고답적인 혼자의 세계에서 스스로에 대한 존재에의 향수 내지는 실존적 고독 속에서 투명한 생명에 젖어서 살았던 시인이라 하겠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인가. 그 따뜻한 마음, 그 따뜻한 생각, 그 따뜻한 말, 그리고 가슴에 젖어드는 인간의 고독함이 실로 고요하게 깊은 가을을 풍겨 주고 있는 게 아닌가.

- 「가을은 자기와 사는 계절」 부분,『고독과 사색의 창가에서』, 자유문학사, 1987 pp 178 ~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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