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의 시인 조병화문학관입니다
 
 

제목: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2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글쓴이: 관리자

등록일: 2023-02-03 12:56
조회수: 124
 

99리 해안(九十九里 海岸)


구주구리 하마라고 했습니다.
눈이 끝없이 달리던 하얀 모래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없이 파도처럼 태평양 검은 물결이었습니다
그 물결에 둥둥 떠있던 한 소녀를
그곳 바다에서 만났습니다.
눈알이 까맣게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밤마다 어선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모래사장에서 쉬고 있는
그 어선으로 갔었습니다.
소녀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달빛에 더욱 하얗게 보였습니다
서로 웃고만 있었습니다
밤마다 밤마다 마을 등불이 멀리 보이는
어선으로 갔었습니다.


--------------------------------------------------------------------------

詩想노트

내가 다니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선 졸업할 때까지 꼭 수영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학년 여름엔 꼭 수영 연수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꼭 해야 하는 의무였습니다.
내가 이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3년 4월이었습니다. 그땐 일본이 소위 대동아전쟁을 시작해서 날로 이기는 전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국내에선 그리 어려운 줄 모르고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전 일본국토가 요새화돼서 군사기밀지역에 얼씬도 못했습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하계 수영 훈련원은 일본 동경만 안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경만 전체가 이미 요새화되고 군사기밀지역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훈련원은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학년 전 학생이 일시에 훈련을 받지 못하고 체육시간에 학교내에 있었던 수영장에서 수영을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을 구별해서 못하는 학생들만 추려내서 동경만 밖에 있었던 방총반도房總半島의 99리里 해안海岸에서 임시로 사원을 빌려서 수영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수영을 못하는 학생들에 끼여서 명예롭지 않은(?) 이 훈련에 끼곤 했습니다.
나는 그해 여름방학에 한번 한국으로 나왔다가 제2학기 개학 2주일을 앞두고 이 반도의 지정한 곳을 찾아 정확히 갔습니다.
한 오십 명가량의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에서 2주일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검푸른 물결이 몰려드는 태평양 연안, 넓고 긴긴 모래사장이었습니다. 일본 이수로 99리라니까, 우리 이수로는 990리가 되는 긴긴 모래사장이라는 곳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광활한 해안 모래사장이었습니다.
그 모래사장과 어촌(마을) 사이에 굵은 해송(바다소나무)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어촌은 그런대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마을 한가운데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절에 우리들 훈련 숙소가 임시로 되어 있었습니다. 정식마을 이름은 구주구리가하마 시라가하마라고 했습니
그러는 동안에 나는 태평양 기슭 바다 수영장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유달리 눈이 크고 피부가 검었습니다. 나에게 참으로 친절했습니다. 저녁, 그러니까 취침 전 밤에 늘 바닷가 모래사장에 올려다 놓은 배에서(어선) 만나자고 했습니다.
소녀는 밤엔 늘 하얀 옷을 검은 몸에 입고 나오곤 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며 피하며 잘도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그것이 나에겐 상당히 귀엽고 매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밤 배에서 만났다가 작별하는 날이 와서 나는 동경으로 다시 떠나왔습니다.
소녀는 내가 타고 떠나는 버스에 수박을 하나 올려놓곤 달아났습니다. 소녀는 모하라 여학교 3학년이라고 했습니다.
기숙사로 여러 번 편지가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편지 답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쁘기도 하고 부질없는 사랑놀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답장내기에 마음이 그리 썩 가질 않았습니다.
아마 그 소녀도 지금쯤 그대로 그 파도치는 구주구리가하마 근처에서 곱게 그날을 혼자 마음속 깊이 추억하면서 늙어가고 있을 겁니다.
밋밋한 인생보다는 이러한 추억이라도 있었던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소녀시절 한 고등사범학교 학생을 짝사랑했었다"라고.
실로 인생은 지나가는 그림자, 추억거리가 있어도 한때 지나가는 그림자, 추억거리가 없어도 한때 지나가는 그림자, 그러나 추억거리가 있는 그림자는 가진 것이 많은 그림자가 아닌가.
추억거리가 없는 가난한 그림자보다는
    
△ 이전글: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3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 다음글: 순수고독 순수허무 제951호 (『시의 오솔길을 가며』)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enFree